천지앞에서 나는 천지의 카리스마에 압도되고 말았다. 천지사방에 서린 저 미만한 카리스마, 봉우리마다 갈기를 세우고 그 카리스마가 흘러온 곳을 둘러본다. 백두산의 높이가 2,750m이고 천지가 그 정상이니 하늘의 위엄이 만들어낸 것일까. 갖가지 투각문(

김종   2014-01-17

세검정 백옥 같은 달빛에 호연지기를 씻던 장사꾼이그 달빛의 고적함에 아득히 취해서돌연히 고향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기까지생의 골짜기는 아흔아홉 골 금성산처럼단 한 번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깎아지른 벼랑과 사막과 망망대해를 눈물과 피땀으로

전숙   2014-01-10

새해 첫날, 일상에서 멀어진 길을 걷는다. 늘 오가는 출근길이나 등산로 외에 오래된 상점이 있었던 골목길이나 옷 벗고 목욕하던 마을 앞 갱변 뚝방길, 어릴 때 오가며 다래도 물외도 따먹던 초등학교 등굣길을 나직한 콧노래를 앞세우고 걸어본다. 장터처럼

김종 시인   2014-01-10

똑같은 향기를 가진 꽃이 없듯이똑같은 빛깔의 무지개가 없듯이똑같은 갈기를 가진 말이 없듯이우리는 서로 다르다‘꽃’이라는 이름처럼‘무지개’라는 이름처럼‘말’이라는 이름처럼우리는 ‘사람’ 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다‘같다’는 말의 감동이여‘다르다’는 말의

전숙   2013-12-27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는 말은 노 젓는 사람이 많으면 배가 엉뚱한 곳으로 간다는 말이렷다. ‘주인’은 ‘한 집안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다. 사전적인 풀이를 넘어서 실제로도 그렇다. 주인이 많다는 것, 하릴없는 자유방임주의가 연상된다.

김종 시인   2013-12-27

나주국립박물관에서 마제석기를 들여다본다낯선 혹성의 황야에빈 몸으로 서있는 최초의 아버지하늘에서, 땅에서 화살처럼 날아오는 수많은 적의敵意생존을 위해화산과 사막과 빙산을 헤매느라발바닥이 터지고 너덜거려화산과 사막과 빙산이 된 발바닥으로 달리고 또 달렸으

전숙   2013-12-20

백두산 가는 길은 우리네 60년대가 숨쉬고 있었다. 좌우로 자작나무 숲이 하얀 각선미를 드러내고 울울창창 도열해 있었다. 그게 내 눈에는 차라리 고혹적인 풍경이었다. 노면은 불안정했고 여기저기 토목공사를 위해 파헤쳐 놓은 흙더미가 흡사 무덤 같았다.

김종 시인   2013-12-20

고비의 유목민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은제물을 산 채로 놓아주는 일이다사는 일이 천국 같은 에덴에서는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물을 죽이고사는 일이 지옥 같은 고비에서는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물을 살린다제물이 되어자유롭게고비로 돌아가는 흰 낙타 한마리주인은 낙타

전숙   2013-12-13

거실 벽면에 빈 액자를 걸었다. 조금 떨어져서 액자를 바라다보았다. 비어 있는 액자의 중심이 블랙홀 같은 견인력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 저기에다 무엇을 던져 넣을꼬? 지지난 해 태풍으로 삼천리금수강산이 파죽지세로 짓밟혔다. 몇 십 년 묵은 나무가

김종 시인   2013-12-13

축지법을 쓰듯이 하루에 한 나라씩을 건넌다나라마다 핏줄 같은 강이 흐르고 있다강의 깊이는 그 강을 마시는 명줄들의 가슴의 깊이다깊은 강은 제 깊이만한 명줄을 받아들이고얕은 강은 제 몸도 허우적거린다강이 키우는 것은 목숨만이 아니다강은 네로와 나폴레옹과

전숙   2013-11-29

늦은 장맛비가 그치면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벌레소리 하나에도세상의 귀가 만들어져 가을은 정녕 온다. 아니 바람 속에서잎과 줄기를 흔들며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외로움과 고통, 그리움과슬픔도 그렇게 흔들며 흔들리며 부서졌다 살아나는 것.반갑고 고맙고 기쁘

김종 시인   2013-11-29

시간이 출렁일 때마다 아버지의 거세된 날개가 펄떡거린다항아리에 따개비처럼 붙박여서 암각화로 기억된 시간이 아버지를 들려준다아무도 길을 가리키지 않을 때바다의 기관지였던 아버지의 날개는 포크레인처럼 바다의 고샅길, 에움길을 열었다그물에 꿰인 아버지의 시

전숙   2013-11-22

욕망 없이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욕망 없이는 다다를 수 없고 거미줄 같은 이 지상의 미로를 독파할 수도 없다. 사랑하는 일까지도 그 물줄기는 욕망에 이어져 있다. 욕망의 회로 위에서 피돌기 하는 존재가 어찌 인간뿐이겠는가. 생명은 욕망이 조

김종 시인   2013-11-22

식당종업원이 홈쇼핑광고처럼 업그레이드된 스프레이화장품을 식탁에 분사한다킬힐을 뽐내던 새내기 식탁은 고급피부관리실의 우수고객처럼 은근 즐기는 눈치다선임 비닐식탁보가 마스크팩을 덮듯이 식탁의 얼굴을 판판이 두드린다식탁의 피부가 양귀비처럼 투명해지길 기다리

전숙   2013-11-15

반복된 논의에도 ‘예술’은 어려운 개념이다. 예술을 위해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아리송한 시간에도 예술가는 곤궁한 헤엄쳐가기를 쉬지 않고 시도한다. 필자의 경우 직접 ‘작업’하기도 하고 3자적으로 ‘작품’ 앞에 서서 독자가 되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김종 시인   2013-11-15

아빠별똥별이 까무룩 사라진 후가방끈 짧은 우리 엄마는 화장품외판원이 되었다사십 년 동안 발을 동동 구르던 엄마의 동동구루무는가방끈 짧은 우리 엄마 혓바닥까지 둥글게 말아먹은 멋진 꼬부랑 이름의 링클크림이 되고금의환향한 한자말 이름을 붙여주름도 없애고

전숙   2013-11-08

용산역에서 마지막 열차를 기다린다눈동자는 텔레비전 화면에 빠져있는데 눈치 없는 후각세포가 어느 냄새의 역사를 파헤친다대합실 세면장에서 고양이세수로 시치미 뗀 냄새가 양파껍질처럼 한 겹씩 벗겨진다아마 세 번쯤의 겨울을 이 대합실에서 보냈을,몇 번쯤 쫓겨

전숙   2013-11-01

암벽등반가들은 암벽에 오르기 전 마음에 새긴 수칙이 있다고 한다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허공에 들면칼이 되어 자일을 끊으리라나는 그 마음을 단풍에게서 본다꽃처럼 아름답게 단풍 드는 일은누구라도 무엇이라도 내려놓는 일이다낙엽을 밟으며 별빛 같은 단풍의 눈

전숙   2013-10-25

전숙승천보에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푸른 마음엔 뭉게구름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데어서오라는 듯 갈바람이 가을의 초입을 정갈하게 쓸어두었다연분홍 자주 하양으로 염색된코스모스 손수건이 기다림처럼 나부낀다다시는 젖지 않겠다고 달라붙는 물기를 툴툴 털고 뭍으로

전숙 시민기자   2013-10-18

전숙 나주 언로를 지키던 아름드리 은행나무느닷없는 번개에 무릎 꺾이던 날모두들 넋 놓고 포기할 때가만히 따뜻한 숨을 불어넣는 마음길이 있었네은행나무의 떡잎이 돋아날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보폭이 자라고 팔뚝이 뚝심처럼 굵어지는 것을 지켜보던,어느 여

전숙 시민기자   2013-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