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

새해 첫날, 일상에서 멀어진 길을 걷는다. 늘 오가는 출근길이나 등산로 외에 오래된 상점이 있었던 골목길이나 옷 벗고 목욕하던 마을 앞 갱변 뚝방길, 어릴 때 오가며 다래도 물외도 따먹던 초등학교 등굣길을 나직한 콧노래를 앞세우고 걸어본다. 장터처럼 북적이는 익숙한 곳보다는 인적이 뜸한 낯선 곳이 유혹적이다. 설레임과 새로움과 자유로움을 준다. 이 나이에 돼먹지 않게 설레임과 새로움과 자유함이라니!
 
고향길, 나주는 나에게는 조금은 낯선 느낌으로 달려온다. 이런 곳을 산책하면서 만나는 풍경들은 나의 유년을 담보한 오랜 기억의 백화점이다.--요즘 나주시를 둘러싼 주변 경관들은 도농의 경관을 함께 볼 수 있는 힐링과 웰빙의 만만디다. 금천 쪽으로 흙먼지를 일으키는 빛가람 도시에는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제격이다. 그런가하면 반남 고분군을 끼고 들어선 국립 나주 박물관은 신석기 시대부터 이어온 우리 나주를 조감할 수 있는 대형 문화유적창고이다. 그 사이로 영산강이 마치나 나주시를 포대기 받쳐 업은 어머니의 품안처럼 아늑하고 포근하게 흐른다.
 
나는 영산강을 볼 때마다 어쩌다 우리가 저리 좋은 강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에 감사한다. 저 강을 중심에 두었으니 마한이나 백제 이전의 고대 국가를 세우고 경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역사의 중심에서 호남의 중심도시로 주목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나주가 우리의 역사에서 늘상 중심이었으면서도 변방처럼 소외된 일 또한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우리가 오래된 골목길을 걸어보려 함은 현재의 땅에서 과거를 읽어보려 함이고 미래의 창문을 열고자 함이다.
 
지금은 나주대교이지만 옛 동문 다리를 조금 진입하여 상 차려졌던 나주장터는 세상의 표정을 간직한 곳이면서 계절을 가장 먼저 불러오는 곳이기도 했다. 봄이면 리어카에 과일묘목이나 씨앗봉투를 줄 세워 팔고 삼복더위 여름에는 제철 과일이 풍성했다. 가을은 어떤가. 검정 쌀, 차조, 서리태, 쥐눈이콩 등 갖가지 곡물들을 봉지봉지 벌려놓고 삐뚤삐뚤 재미있게 쓴 표지판을 앞세워 선을 보였다. 그중에 눈에 띄는 변화는 '무공해'와 함께 원산지를 따로 표시한 것. 바뀐 세상을 탓할 순 없지만 조금은 씁쓸했다. 고풍이 느껴지는 도심의 골목길이나 도로변 장터의 구경꾼으로 어슬렁거리면서 난장에서 사람과 나누는 교감은 물론이고 다양한 삶의 색깔을 엿보며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은 5일장과 매일시장을 통합하여 ‘목사골시장’으로 새로 태어났다. 번듯한 건물과 넓은 주차장, 가설무대까지 설치되어 명실공이 호남의 전통시장으로 거듭났지만 추억의 가슴 한 자락에는 아직도 삐뚤삐뚤하고 왁자한 옛 오일장이 숨어있다.
 
나주는 어디를 가도 옛 도시의 역사적 깊이와 정체성이 살아있는 곳이다. 2014년, 청마의 해를 기점으로 다시금 역사의 지하에 묻혀있는 우리 나주를 발굴 재현해야 한다. ‘스토리’를 억지로 만들고 꾸며내어 ‘스토리텔링’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발에 걸리는 한 줄기만 잡아당겨도 고구마줄기처럼 바리바리 딸려 나올, ‘텔링’할 필요조차 없는 ‘스토리’가 무진장하다. 흙 한 줌도 무심히 밟지 말고 붓질하듯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새해, 나주의 문화에 문안 올리듯 잊혀진 돌 한 무더기라도 찾아내어 호명해주는 것이 우리 후손들의 의무이며 책임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