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종/시인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그 시절 우리는 가난했다. 지금이야 많이 먹어 탈이지만 우리의 지난 시절은 사는 일이 고픈 배 채우는 일이었다. ‘쌀과의 전쟁’이 ‘살과의 전쟁’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나의 명절 이야기는 위의 동요처럼 ‘새로 사온 신발’로부터 시작된다. 폐타이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이 고작이었고 그마저 닳거나 구멍이 나면 꿰매신고 신 닳을까봐 아예 신을 벗어들고 등·하교하기도 부지기수였다.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오지만 그 시절의 우리의 모습이 꼭 그랬다.

▲ 김종 시인

그런 터에 어머니께서 심부름만 잘해도 학교에서 상만 타와도 “이번 설에는 아버지께 말해서 운동화를 사주마” 약속하셨다. 운동화 한번 신어보기가 얼마나 소원이었던가. .‘운동화’라고 해봐야 요즘처럼 유명상표 붙은 고가의 제품도 아니고 발등에는 두 줄짜리 하얀 선이 그려지고 뒤축에는 자그마한 꼬리가 달린 좀 촌스런 것이었다.
 
들뜬 마음에 하루하루가 갔다. 아버지께서 까치설날에 서는 ‘기름장’에 다녀오셨다. 장봇짐을 열어본 어머니께서 운동화를 꺼내어 나에게 주셨다. 뛸 듯이 기뻤다. 그렇잖아도 지난밤 꿈에 날개 달고 날아다니는 운동화를 잡으려고 잠자리채 들고 무지 뛰어다녔는데 그 운동화를 사오신 것이다. 하룻밤만 자고나면 저걸 신고 아이들 앞에서 잴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서 운동화를 신었다 벗었다를 여러 번,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온 동네가 어둠 속 고요에 잠겨 있었다. 이 밤중에 어디를 가나 망설이다가 친구네 집 사립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 다 잠을 자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그냥 방 윗목께로 가서 운동화를 들고 부처처럼 앉아있었다. 잠을 깬 친구 아버지가 검은 덩어리로 웅크리고 있는 나를 보고 “누구냐?”고 황망히 말했다. 나는 이름을 말하며 “나 운동화 샀어요” 했다. 친구 아버지가 불을 켜고 운동화를 보시더니 “아, 그래 참 좋겠다”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우리에겐 여러 개의 명절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설과 추석인데 모두를 음력으로 지낸다. 그러나 설날만은 양력으로 바꾸기 위해 100년 가까이 음력설은 막아두고 살았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행된 관계로 지금도 나이든 어르신들은 양력설을 ‘일본설’이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여간 설 명절을 지금의 음력설로 되돌리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행정적으로 양력정초를 정식 설날로 하고 음력설은 옛날설인 ‘구정’이라 하여 흐름과 풍속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국가시책으로 열어놓은 양력설은 소 닭 보듯 시들하게 지나가는데 음력설만 되면 터진 봇물이 장강을 이루어 흘러가듯 천만이네 천오백만이네 귀성인파로 붐비고 도회지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고향으로 고향으로 가는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양력설을 밀어붙이던 시절에는 이중과세다 뭐다 해서 음력설은 몹쓸 명절처럼 내몰았지만 끝내 되찾은 나라처럼 민족 고유의 대명절로 되돌려 놓았다. 명절 쇠기는 그 무엇보다 크고 깊은 민족의 풍속일 터. 일제 강점기부터 실시된 양력설은 음력설의 부활로 이제는 명맥만 남게 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 일본인 데도 하루아침에 양력명절로 바꾼 그네들과는 심정적으로 가장 먼 나라가 아닌가 싶다.

‘설’은 한해의 ‘첫날’이란 의미 외에도 ‘개시(開始)하다’에서 온 ‘선날’이나 ‘섧다’에서 ‘설운 날’, ‘조심하고 삼가는 날’인 ‘신일(愼日)’ 등으로 그 어원이 짚어진다. 유래 또한 중국의 사서 속에 나오는 신라인들의 원일(元日) 배례나 『삼국사기』제사편에 기록된 고이왕(228)이나 책계왕(287) 등의 정월 제사들이 설날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설 풍속은 이어져서 고려조에 설과 정월 대보름, 조선조의 설날이 낀 4대 명절이 우리 민족의 주요 명절로 자리를 잡았다.
 
설과 추석을 비교할 일은 아니로되 설날이 추석보다 매력적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세뱃돈 타기가 아닐까 싶다. 세배객이 어른일 때는 술과 음식을 차려내지만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이 딸린 떡과 과일이 나왔다. 가래떡을 썰어서 떡국을 쑤고 정성으로 고아낸 조청에 쑥떡과 인절미를 찍어먹던 일, 풍속이 달라진 지금 세상에 한층 간절하다.

또다시 설날이 돌아온다. 고향 찾아 먼 길 달려온 자식 걱정에 등불 잡고 동구 밖에 나온 노모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 옛날이여, 명절의 횟수만큼 아름드리나무가 된 나는 지금도 명절생각 앞에 어머니 품안을 파고드는 아이처럼 마냥 철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