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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기업을 운영하면서 보니 정부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한다하는 재벌들조차 중공업에는 손대기를 꺼려하던 때였다.
한편 그가 설립한 일본의 이천 제강도 1979년의 제1차 오일 쇼크와 공장 인근주민들의 공해 시비, 그리고 금융 지원이 막히는 바람에 끝내
문을 닫았다. 거의 매일처럼 일본인 현지 주민들의 공해 반대 시위에 맞닥뜨려 곤욕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들의 이전 요구에 못 이겨 은행에서 20억 엔을 대출받아 백방으로 애를 써봤지만 당장에 공장 부지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회사를 해산하고 보니 기업주인 그의 피해 못지않게 인근 주민들 역시 수입의 터전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975년에 그는 나고야에 ‘알프스 스틸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알프스 스틸은 나고야의 광활한 터를 잡아 세운 공장으로 차남 형렬이 경영하는 회사로 종업원만도 350명에 달하는 회사로 번창했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그는 가족들과 함께 줄곧 나고야에 주소를 두고 살았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고국으로부터 온 무수한 인척과 고향
유지, 각계 각층의 동포들이 그를 방문해주었다.
공장에서 그들을 맞는 경우 그는 늘 작업복에 기름장갑을 낀 차림새였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손님이 찾아와도 그 모습만은 바꾸지 않았다.
더러는 만나기에 앞서 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전화부터 받는 경우도 있었다. 방문자들이 기억하듯 그는 전화가 걸려오면 비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받았다.
그는 대다수 재일 한국인들이 하듯 일어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일단 ‘서상록입니다.’라고 한국말로 대답해 놓고 저편의 반응을 기다리곤 했다. 그것이 어린 나이에 도일한 이후 노년에 이르기까지 단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었으므로 그 집요한 귀화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고집해온 그의 버릇이자 고집이었다.
고국에서 오는 손님들과 그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그리고 장학재단의 발전 계획 등에 길고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학생들에게 늘 들려주던 교훈을 되풀이하면서 부모들의 교육열이 높고 훌륭한 학생들이 많으므로 그들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이란 낙관론을 펴보기도 했다.
76세가 되던 1986년 무렵만 해도 그는 활기차게 일했다.
아침 다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규칙적인 하루 일과를 시작했고, 정각 7시에 출근해 밤 7시에 퇴근하며 규칙적으로 공장에서 일을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독서와 명상을 한 후 잠자리에 드는 것이 전부일 뿐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체력은 왕성했다. 공장 작업대에서 하루 열시간 가량 작업을 하노라면 옆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그를 따라오느라 힘들어 할
정도였다.
그러나 건강과 체력에도 한계가 왔다.
1989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그는 급기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한번 올라간 열이 떨어지지 않아 옆에 누군가가 붙어서서 계속 파스를 갈아붙여야 했다.
나이 여든이 되자 가뜩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가는 터라 그는 1990년 봄이 되자 드디어 한국으로의 영구 귀국을 단행했다. 그것은
고국을 떠난지 63년만의 일이었고 한시에 있듯 홍안의 미소년은 어느샌가 80노객이 되어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철야의 들판을 바라보고 섰노라니, 문득 내 머리에는 1956년 겨울, 어머니의 유골을 이장하기 위해 고향을 찾았을 때의
광경이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어머니의 이장식은 말마따나 온 군민의 잔치였다. 누군가 대략 추산해보니 이 날 찾아온 조문객만도 1만 5천 명에 달했다 한다. 그들을 위해
며칠간 손님을 위해 밥을 지은 쌀만도 몇 백 석이 필요했다.
인산인해로 몰려온 사람들이 논과 밭을 가득 메우고 선 사이로 백여 개의 만장을 앞세운 어머니의 꽃상여가 나갔다. 따르는 사람만도 족히
시오리는 늘어선 장례 행렬이었다.
그때 그는 우리 민족이 참으로 질기게 이어온 생명력을 보았다.
‘아하, 저렇게 줄을 이어 살다 가고, 간 자리에서 다시 대를 이어 사는구나! 아무리 거센 바람이 격락이 저 위로 지나가도 그 생명력만은
영원하여라!
이제 팔순 노객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그는 마치 그날의 인파처럼 눈 앞 들판 가득 일렁이는 벼와 풀,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지나온 삶 역시
그런 생명력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기업인 서상록을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