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 ‘나고야에 새롭게 둥지를 틀다’

1945년 미군기의 공습으로 이천 공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서상록은 참으로 막막하였다. 전쟁 중에 그것도 조선인 공장에 미군기의 공습으로 인해 받은 피해를 일본이 일일이 배상해 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공장은 폭격으로 사라졌지만 이천공업의 기술력과 서상록의 경영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폭격을 받은 뒤 사흘 만에 대기업으로부터 마에쓰루에 있는 자신들의 공장으로 와서 일을 봐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같은 날 주방용품을 만드는 요시다 제철에서도 찾아 와서는 동경 가까운 지점인 나고야에서 와달라는 요청 등이 쇄도하자 상록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요시다 제철에 마음이 내켰다.

기왕에도 공장을 생활용품 공장이 많은 동경 근처로 옮길까 하던 차였고 나고야에 본사를 둔 여러 회사들과 거래를 해오던 참이라 새삼스레 낯선 곳도 아니었다. 

공습으로 공장이 사라진 일 보다 더 놀란 일이 그때 벌어졌다.

상록이 나고야로 자리를 옮긴다는 말이 퍼져나가자 이천 공업에서 일하던 종업원 100여명이 상록에게 찾아 온 것이다.

“사장님 저희들은 어떻게 살라고 혼자 가십니까? 저희들도 나고야로 제발 데려가 주십시오.”

상록은 종업원들을 도닥거렸다.

“먼저 나고야에 여건을 알아 볼 테니 부르거든 빨리 짐을 챙겨서 오게나.”

곧 부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고야로 떠난 상록은 오래지 않아 그 약속을 지켰다.

나고야에 가자 상록을 초청한 요시다 제철 흥업은행에서 120만엔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공장은 고소리에 있는 초등학교를 빌릴 수 있게 조치까지 해 주었다. 당시 ‘국민총동원체제’가 발효 중이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정부나 기업의 요청이 있으면 교육시설은 얼마든지 공장으로 개조해 쓸 수 있었다. 그 터와 인근부지만도 5만평에 달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쓰다 남은 기계도 옮겨다 설치하고 공원들이 살 집에다 식량까지 지원해 주었다. 그 삭막하고 황폐한 전쟁 통에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일터를 마련한 상록은 공장이 있는 고소리와 가족들이 남아 있는 오바마를 오가며 회사 일을 보았다.  

기차를 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손잡이를 잡고 문가에 매달려 다녀야 했다. 터널이나 다리를 지날 때 실수로 손잡이를 놓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저승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인지 차를 타고 다니면 기찻길 주변에 흩어져 나뒹구는 시체가 많았다.

소위 저승 기차를 타고 다니며 회사와 집을 오가던 중 드디어 태평양 전쟁이 끝이 났다.

아무튼 역사는 흘러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일본 체류 19년째인 상록의 개인사도 역사와 더불어 새로운 흐름 위에 놓이게 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