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 폭탄이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일본 해군 장교가 피스톨을 만들자는 제의에 상록은 고민에 빠졌다.

전쟁 물자인 피스톨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군부의 명령서 한 장이면 아무리 거대한 공장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판이었다.

상록은 일단 버티는데 까지 버텨보기로 하고 그에게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사람을 해치는 무기 만드는 일만은 도저히 할 수 없소.”

다행히 해군장교가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갔지만 제2,제3의 손길이 뻗쳐왔다.

군인보다 더욱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는 허리에 찬 군도를 덜그럭거리며 드나드는 현역 장교가 아니라, 그들을 등에 업고 설치는 군속(軍屬)들이었다. 걸핏하면 ‘천황폐하’를 입에 올리는 그들은 민간인과 군인의 중간에 서서 교묘한 방법으로 기업주를 구슬려 자신들의 잇속을 차렸다.
 
1944년 1월, 기차 부품 외에도 두어 건의 제작 교섭을 진행하는 중에 느닷없이 군속 하나가 나타나기가 막힌 소리를 하였다.

대형 군함에 탑재하여 잠수함을 침몰시키는 어뢰는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민수용 제품 업체들이 상록의 회사에 찾아왔고, 급기야는 교섭 당사자들이 상록을 둘러싸고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서로가 내세우는 주장은 어느 쪽이 더 나라를 위하는 일인가를 놓고 열띤 언쟁을 벌였다.

두어 시간 넘도록 서로의 주장이 맞서자 어뢰 제작을 주장하던 군속이 화를 내면서 자신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사뭇 억압적인 어조를 말했다.

“명령이란 말을 아느냐? 이는 천황폐하의 명령이다!”

‘천황폐하’라는 말이 나오자 당시 일본인이면 누구나 그래야 했듯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끊었다. 소위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의 표시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반역자'라고 몰아세우던 시절이었다. ‘천황폐하’는 그 단어만으로도 무소불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릎을 끊은 상태에서도 상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강제로 징병되어 전선에 나간 고향 젊은이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군속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전쟁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호기요. 우리도 이틈에 한 몫을 거머쥐어야 할 것 아니겠소? 전쟁이 어느 편의 승리로 끝나던 우리는 상관없단 말이요. 서 사장은 전쟁이 끝나면 이 땅을 뜰 작정이요? 어차피 그때도 나와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것 아니요? 평화로운 시절이 오면 그 때 더 큰 도움을 줄 테니 일단 협조하시오.”

상록에서 더 이상 대꾸가 없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명령조로 말했다.

“마음을 정하는 데 여덟 시간의 여유를 줄 테니 잘 생각해보시오”

하룻밤을 뜬 눈으로 보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절대 할 수 없다”였다. 상록이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군속은 상록이 바보스럽다며 화를 내며 물러갔다. 일본인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 못지않게 기술력과 장인정신에 대한 존경심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상록은 무사할 수 있었다.

군수용품이 아니더라도 하청 받은 일을 해내자면 낮과 밤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이처럼 이천공업이 여러 군데로부터 주목을 받고 반강제로 일을 떠맡아야 했던 것은 기술력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주문받은 물건은 주문자의 요구대로 정확한 제품을 제 시간에 제작해낸 성실성도 인정받았다.

전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던 1944년 미군기의 공습으로 일본의 주요 도시와 공장에 대한 폭격이 심해졌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는지 미군기는 군수 공장지대를 골라 유독 많은 폭탄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천만명 이상의 일본인이 재해를 입었고 이듬해가 되자 공습은 더 심해졌다. 이제 폭격은 군수공장 뿐 아니라 눈에 띄는 목표물이면 무엇이나 강타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천 공업이 가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생활필수품목에 해당하는 주방, 생활용품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5년 3월 13일, 하늘을 뒤덮을 듯 까맣게 떠온 미군기로부터 한 차례 공습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이천 공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