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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금하 서상록(徐相錄) ⑬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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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승인 2009.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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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도 직공도 사환도 1명인 회사 창립

8년 동안 프레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상록은 자신이 익힌 기술을 좀 더 청조적인 작업에 쓰고 싶었다. 고심 끝에 자립을 결심한 상록은 1938년 10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오사카에 ‘이천 금속공작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때 나이 28살이었고, 일본으로 건너간 지 꼭 12년만이었다.

일본 발음으로 ‘또시까와(利川 )’로 정한 상록은 자신이 이천 서씨의 자손임을 어떤 경우에도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었다. 이천 금속공작소의 주된 업종은 각종 프레스 가공과 성형이었다.

그러나 명색이 회사였지만 소위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사장과 직공, 사환 등 1인 3역을 맡아야 했고, 공장시설이래야 외상으로 들여놓은 프레스 한 대에 다다미 두 장을 깔만한 3평 남짓한 작업장이 전부였다.

상록은 처음에는 그 안에서 혼자 작업을 하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일단 기계 구입비부터 갚아나갈 작정이었다. 영세한 공장을 차리는데도 상록은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계’ 보증금 사건에 휘말려 120원을 날렸고, 아버지 치상에 빚진 200원을 갚느라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학비와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돈은 고향에 송금 하고나면 빈손이었다.

이런 와중에 상록은 퇴직금으로 받은 15원으로 일을 낸 것이다. 그동안 쌓아둔 신뢰와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고 주위 동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끝에 회사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프레스 기계 한 대를 공장에 들여 놓은 상록은 밤새 그걸 어루만지며 되뇌었다.

“부는 바람의 서늘한 맛을 잘 알 수 있는 때는 반드시 더위가 몸을 괴롭히고 있을 때일 것이다. 자기의 행복을 깊이 느끼는 사람은 반드시 큰 고난과 시련을 겪어본 사람이다. 이를 겪지 않은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부터 알 수 없다. 더위에 시달리지 않고는 시원한 바람의 맛을 알 수 없다.”

상록은 낮이고 밤이고 프레스 기계이만 매달렸다.

‘옆에서 열 개를 만들면 나는 천 개를 만들겠다’는 것이 서상록의 경영철학이었다. 기술과 성실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보겠다는 다짐이었다.

주위에 엇비슷한 공업소를 차린 제주도 한씨는 사상록을 가리켜 ‘지독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일을 하는 틈틈이 상록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직접 주문을 받아왔다.

처음에는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서 하청업자로부터 일을 받아야 했다. 하청업을 마치고 난 뒤 완제품을 놓고 검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천 금속공작소’라는 이름이 업자들 사이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주로 다루는 물건은 강판이었다.

엉성한 기술로 강판을 다루려고 덤벼들었다가는 판이 일그러지거나 튀어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강판의 고유한 속성을 살리면서 주문자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야만 이 분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대다수 공업소들이 애써 견본을 만들어내고도 번번이 주문처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상록은 우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이천 금속공작소의 기술력을 입증 받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구의 주문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견본 제작에 매달렸다.

3달의 노력 끝에 상록은 어떤 강판이건 속성을 훤히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강판을 자르는 작업부터 위는 작업, 평평하게 놓인 강판의 속을 패이게 만드는 작업 등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상록의 ‘이천 금속공작소에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상록이 만든 견본이 거래처 업자들 사이에서 돌면서 한꺼번에 주문이 쏟아졌다.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상록이 공장을 차린 이시하라죠에는 엇비슷한 크기의 공업소가 즐비하게 줄지어 있었다. 저마다 3평 정도의 크기에 같은 시설을 들여놓은 영세한 공장들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평이냐, 아니면 옆 가게를 사들여 6평 또는 9평으로 넓혔느냐 하는 차이였다.

주문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일손이 부족했고, 공장도 부족하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공업소를 내고 있던 강진 사람이 사업을 포기하고 귀국할 생각이었다. 강진 사람을 찾아간 상록은 차비를 보태주는 대신 그의 공장을 물려받았다. 조건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계와 공장을 맡되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훗날 얼마 정도의 보상만 해주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 공장을 물려받은 즉시 급히 고향으로 전보를 쳐서 바로 아래 동생인 상준을 건너오게 하였다. 언젠가 동생을 불러올 생각이긴 했으나 계획보다 기회가 빨리 온 것이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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