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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윤영근의 영산강이야기 13-식영정1성산별곡으로 대표되는 시가문학 산실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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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호] 승인 2006.04.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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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호의 푸른 물이 울렁이며 하얀색으로 찰랑거린다. 수면 옆으로 보이는 예쁜 문필봉이 성산이다. 무성한 소나무가지 때문에 봉이 가렸지만 빼어난 모습의 문필봉은 훌륭한 학자들의 탄생을 예고해 주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별뫼(星山)로 부르는 곳으로 광주호를 끼고 도는 일주도로 옆의 능선에 식영정이 자리했다. 성산의 한쪽 끝 언덕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건물에 작은 방이 하나 딸린 사계절용 정자인 셈이다.

광주호 상류에 자리한 식영정은 조선 명종15년(1560)에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면서 장인이 되는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지었던 정자로서 지금은 전남지방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식영정에 오르기를 즐겨하고 있다.

식영정의 동쪽 마당에는 정철의 성산별곡 시비가 까만 오석에 원문 그대로 기록돼 서 있다. 시비의 뒤쪽은 노송이 근엄한 포즈를 취하며 오는 이들을 내려다본다.

노송의 잔가지에서는 솔잎에서 풍겨나는 푸른빛이 먹빛처럼 진하게 풍겨난다. 세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닿을 수 있을 만큼 굵은 몸통은 500년의 세월을 먹었음 직하다. 소나무 줄기에 붙은 껍질은 거북등처럼 골이 파졌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노송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소나무는 남농 선생이 즐겨 그려왔던 산수화 속의 소나무 같았다. 남농 선생은 당대의 천재화가로 남종화의 맥을 이어오면서 사계절 내내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를 즐겨 그려왔다.

소나무는 꿋꿋한 선비의 지조 있는 심지를 잘 나타내주기 때문으로 좋은 소재가 되었으며, 남농은 수석에도 발군의 심미안을 보여주었다. 남농이 유달산 자락에 사실 때 필자는 여러 차례 수석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남농으로 부터 애석 사상을 전해 들었다. 어떤 돌이라도 귀하게 여기며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남농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팔작 지붕에는 골기와를 올려 주변의 무성한 숲과 어울려 멋이 넘친다. 두꺼운 송판으로 깐 마루는 비에 젖어 등이 굽어진 것도 있었다. 광주호의 넓은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잔잔한 수면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거친 성격을 부드럽게 다듬어주기도 한다. 이는 부드러운 물이 주는 필링이다.
 
석영정을 최초로 세운 서하당 김성원

식영정을 중심으로 서하당 김성원과 송강 정철은 함께 공부한 동문으로 성산 일대의 화려한 자연 경관을 벗삼아 호연지기와 생명존중의 자연을 아끼고 가꾸는 기초토양을 길렀다.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라고도 하는데 식영정을 출입하던 단골 멤버 중에 네 사람의 시문이 뛰어나서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들은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을 말한다. 성산 시단을 형성하고 마치 신선처럼 시회와 강학으로 서로 학문을 연마하며 다정하게 지냈기 때문으로 시의 내용이 천하제일의 고수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식영정을 최초로 세운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으로 광주의 충효리에서 태어나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화를 입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식영정을 짓고 나서 자연과 선인들이 남긴 시가문학 시조서적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곳을 찾는 많은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는데 특히 정철과는 학문내용까지 일치해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서하당이 쓴 시조 중에서 자연을 숭배하고 사랑했던 한편의 시조를 서하당 유고에 전해오는 것을 뽑아 감상해 보자.

그가 세운 식영정은 정철이 하는 작품 활동의 주무대였다. 조선최고의 가사 작품 성산별곡(星山別曲)도 여기서 탄생했다.
당시의 많은 문인들이 식영정에 출입하며 탄탄한 시단을 형성했던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김성원은 평소에 예술적 감흥을 갈고 닦았으며 벼슬에는 뜻이 적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성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곳에서 자연과 함께 보냈으며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만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혼란스런 와중에도 죽기를 각오하고 의병활동에 나섰다. 조선선비들의 대쪽같은 지조이며 사회지도층을 이루고 있는 자들의 의무감이면서 지켜야할 것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지인 것이다.

/나주 중앙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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