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만 가도 풍속이 다르고 백리만 가도 습관이 다른 것입니다. 같은 글인 한자를 두고 읽는 방법이 다른 것은 습관과 풍속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당신에게는 우리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우리 역시 당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천성이야 같다고 보여 지지만 생활이 다르고 습관이 달라 말이 서로 다른 것을 어찌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질문은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이 상을 당해 집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해서 묻겠소. 당신들도 주자가례로 행하오?”

  “조선에서 상례 시에는 반드시 ‘가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나도 마땅히 그렇게 하고 있지요. 다만 폭풍을 만나 정처 없는 바다를 헤맬 뿐이지요. 아버님 영전에 곡도 못하고 있으니 통곡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혹시 시(詩)를 지을 줄 아시오?”

  “시는 조선 사대부들의 필수교과목으로 언제나 지을 수 있지요. 시가는 풍월을 즐기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도를 배우는 독실한 군자들이 할 바는 아닙니다. 나는 격치(格致)하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학문을 익히고 있습니다. 시가에 뜻을 두고 있지 않지만 남이 선창하면 응답은 할 수 있습니다.”

최부는 제주도에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며 지은 시가 생각났다. 공간의 원근법을 심상(心像)의 원근법으로 도치시켰던 시다. 충과 효를 아우르는 내용이 시공을 뛰어 넘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표류 길에 엉뚱하게도 시가 필요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머나먼 구중궁궐 님 생각 간절하고
흰 구름 천리 밖 어버이 그리워라.
아직도 충효를 다하지 못했으니
내 어찌 나그네로 끝날 수 있으리.

 그때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이가 최부의 손바닥에 글씨로 써서 말했다.

  “다만 당신과 우리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장님이요, 벙어리일 뿐이지 어긋남이 없는 심성이 고운사람 같소. 안타까울 뿐이요.”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최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말을 명심해서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처신하며 함부로 경솔해서 아무 하고나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적이 중국의 해안을 수시로 침입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못살게 굴며 도둑질해가고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놈들을 막기 위해서 고성 내에 새로운 기관을 설치하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다.

무단으로 쳐들어온 왜놈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도지휘(都指揮)를 세우고 파총관(把摠官)이 군인들을 지시 감독해온 것이다. 해금(海禁)정책으로 바다에 얼씬거리는 왜구는 보이는 대로 잡아 일단 처형을 한 다음 나중에  결과만 보고하도록 했다.

그는 최부에게 아주 소중한 정보를 말해 주었다. 최부 일행으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최부일행이 탄 배가 처음 뭍에 댔던 곳은 파총관이 지키는 방어용 목책인데, 바다의 울타리를 지키고 있던 수채관(守寨官)이 당신들을 보고 왜적이라 판단하고 먼저 목을 베어 공을 세우려 했던 것이라고 했다.

왜구로 오인 받아 계속되는 심문

 그래서 전번 보고에 이르기를 왜선 14척이 해안을 침입하여 주민을 폭행하고 도둑질을 했다고 보고했소. 그때 병졸을 거느리고 가서 당신들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배를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로 도망쳤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최부는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아 그랬구나.’

최부의 입에서는 한탄하는 소리가 저절로 터졌다. 아직까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일이면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하여 사실여부를 판단할 것이오.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소. 거짓 없이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최부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고마움을 표하려고 했다.

  “고맙습니다. 그대는 뉘신지요?”

  “알 것 없소. 당신을 위해 한 말이니 조심하시오. 이곳은 매우 위험하오.”

 그런 말을 처음 듣는 최부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두려움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육지로 도망친 순간의 판단이 일행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마을을 지날 때마다 구경꾼들이 목이 잘리는 모습을 흉내 냈던 이유를 이제야 알듯 했다.

 그리고 갈수록 난폭하게 대하던 주민들의 속뜻은 어차피 죽을 사람으로 치부했던 것으로 여겨져 아찔한 순간을 넘긴 일행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구의 노략질은 집요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온 그들은 닥치는 대로 훔쳐가고 보이는 사람마다 난도질을 했다. 그들이 주로 많이 쳐들어온 곳은 배를 대기 좋고 신속하게 바다로 빠져 나갈 수 있는 곳을 택했으며 그런 곳으로 도저성 일대가 그들의 침략 장소로 항상 물망에 올랐던 것이다.

 특히 명 태조(홍무 17년)때부터 영종 정통 4년까지 55년간 절강성의 동부해안지역에 침략의 발이 잦았다. 그 중에도 도저성 일대가 가장 크게 피해를 보았고 결국은 이곳에 성을 쌓고 그들의 침략을 막아야 했으니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저고성이 그것이다.

 도저고성의 중요한 출입문은 중문으로 만들었으며 앞부분은 사다리를 놓아야만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옹성위에는 몸을 숨기는 치(雉)를 만들어 숨어있던 병사가 침략자들을 향해 활이나 창을 던져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했다.

 성곽을 든든히 해서 양쪽 측면에는 작은 출입문을 만들고 성벽 따라 밖으로 깊게 파서 물이 흐르게 했다. 폭이 넓은 해자인데 인공 강을 만들어 침략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중 삼중으로 막아 완벽하게 차단한 것이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파총관과 천호를 중심으로 십여 명이 큰 탁자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서서 본격적으로 심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정보를 끌고 가더니 여러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정보는 경차관 최부를 중심으로 일행43명의 최고참 역할을 해왔던 자이다.

  “배가 14척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지?”

  정보가 말했다.

  “아닙니다. 단한 척 뿐입니다.”

  이번에는 정보를 쫒아내고 최부를 불러 들였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위협부터 했다.

  “당신들이 타고 온 배는 몇 척이나 됩니까?”

  “오로지 한 척 뿐입니다.”

  심문을 하던 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고 공갈협박을 하면서 말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