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최부 일행을 끌고 가는 천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기를 계속한다. 더 이상 걷기가 힘들어진 최부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전했다.
 
 “우리일행은 표류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목숨만 유지하다 중국의 해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관리를 만나 배불리 먹게 되어 이제는 살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장마 비로 인하여 길바닥이 엉망진창이 된 길을 걸어오느라 자빠지고 골짜기에서는 돌에 채여 넘어져 몸뚱이는 흙탕물 천지가 된 채 얼어붙었습니다.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도 먹지 못하여 이미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지경입니다. 불순한 폭우 속에 짐승처럼 끌려 다니는 우리들은 필시 객사하리라 염려됩니다. 살길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허청이 대답했다.

 “실인즉 어제까지 고성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굶주림을 자초한 샘이오. 이제 고성(古城)에 도착하면 음식이 공급될 것인즉 그러니 어서 빨리 가도록 합시다.”

이미 발이 부어오르고 여러 군데 상처가 난 최부는 더 이상 걸 수가 없는 몸이 되었다. 제자리에 서있기도 힘든 그는 길가에 누워버렸다. 기력이 쇄진한 그는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어제도 이런 상황이 벌어졌었다.

이를 본 손효자, 정보, 김중, 막쇠, 만산, 최거이산 등은 최부를 둘러싸고 앉아 통곡하며 울어댔다. 때마침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를 본 정보가 천호소(千戶所) 허청에게 말했다.

“우리의 경차관 최부는 걸 수가 없습니다. 말을 타고가게 해주십시오.”

“무슨 돈이 있어서 소를 탈수 있단 말이요?”

“돈은 없지만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라도 벗어줄 테이니 소를 타고 가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허청의 대답은 냉담했다.

“우리도 어찌 당신들이 측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신들은 이미 대명(大明)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온 자들로 국법에 의하여 끌고 가는 것이므로 허락해 줄 수없소.”

하는 수없이 이정, 이효지, 허상리 등이 교대로 최부를 업고 고개를 하나 넘었다. 20리쯤 더 가자 해안선 따라 길게 성곽이 이어졌다. 해문위(海門衛)였다. 바다에 나타나는 왜구를 방비하기위한 성(城)인 것이다.

중국에 만리장성이 있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바다를 지키고 출입문 역할을 해주는 바닷가에 있는 해문(海門)으로 도저고성(桃渚古城)이 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듣는 것이다. 바다에 석성을 쌓아 막을 생각을 하다니 참신한 아이디어라 하겠다. 오죽이나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으면 바다에 까지 성을 쌓았을까?

도저고성은 임해(臨海)시 동남쪽 60km지점에 위치한 명대에 쌓은 항왜(抗倭)유적지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성이다. 조선에서 성웅 이순신 장군처럼 중국에서 바다의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는 척계광장군의 성지로 지금은 중국 국가문화재로 중국최대의 왜구방어 유적지가 도저성인 것이다.

도저고성은 왜구의 불법침입이 한창이던 1387년 9월에 축성을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다가 다시 돌로 쌓아서 지금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내려오고 있다. 고성의 높은 곳에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데 그곳이 성을 지키는 자들이 있는 해문위 천호소(海門衛 千戶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

시도 때도 없이 침략을 일삼는 왜구를 견디다 못한 명나라는 노략질이 심한 이곳의 해안선을 따라 바다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왜구들은 갖은 만행을 저질러 죽은 자들의 뼈가 산을 이루고 몸에서 난 피는 흐르고 흘러 내가 되었다. 이에 격분한 중국의 조정과 지역민들이 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온 것이 도저고성이다.

황해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제일 먼저 배를 대기 좋고 가까운 곳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 곳이 주우산 군도 일대를 중심으로 바다가 잔잔한 절강성 부근의 도저고성이 있는 이곳이라고 한다.

지형적인 특색이 왜구의 잦은 출몰을 불러들인 것이다. 성을 쌓은 중국민족의 영웅 척계광장군과 군민이 분연히 맞서 왜구를 성내에 한발자국도 진입시키지 않고 격퇴시켜 대승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고성 안에는 성벽과 함께 바다 쪽을 제외한 동, 서, 남 3개의 고성문, 명대의 거리, 청대의 고택이 원래의 형태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옛집에는 도저주민들이 지금까지 거주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고금시공(古今時空)이 함께하는 역사와 현실을 보면서 세월의 흔적을 더듬으며 망연자실할 뿐이다.

성을 쌓을 때 석각한 조원(眺遠), 진해(鎭海)의 글씨가 보는 이들을 먼 옛날의 아련한 추억 속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현재 도저진의 인구는 약 9만 명으로 도저성안에서만 1,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성의 전후로 7~8리 간에는 갑옷을 입은 군졸들이 창과 총, 칼과 방패 등으로 무장한 채 성을 지키고 있었다. 성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으며 무쇠철로 만들어졌다. 성곽 위로는 한대의 수레가 넉넉하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그러니까 말 5필이 동시에 줄을 맞춰 걸 수 있을 만큼의 넓은 폭이다. 경계초소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게 철통 수비를 하고 있었다.

성안에는 점포들이 즐비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으며 물자가 풍부했다. 최부 일행은 성안에 있는 군인들의 숙소를 사용하게 했고 일행의 책임자인 경차관 최부는 별도의 관사에 머물렀다.

그런데 최부의 모습이 너무 험악해서 보는 이마다 놀라 까무러질 정도였다. 너무 초라하고 입고 있는 옷에는 진흙투성이로 얼굴은 움푹 들어간 두 눈과 앙상한 뼈가 드러나 귀신같은 몰 꼴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가 입고 있는 상복은 흙먼지가 묻어서 더러웠고 쓰고 있는 두건은 헐렁하게 풀어져 나풀거리는 모습의 꼬락서니가 엉망이다. 그런데도 정신만은 멀쩡해서 일행 43명을 대표해서 제반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도저고성의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씨를 써서 최부에게 내보이며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시도하는 필담(筆談)이라 하겠다.

 “어제 상관에게 보고하였는데 왜선 14척이 명나라 변경을 침범하여 선량한 주민들을 두들겨 패고 도적질을 했다고 했소. 당신들이 정말로 왜인이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에요. 조선의 선비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부용(盧夫容)이라는 중국의 선비가 물었다.

 “당신이 쓴 글은 우리와 똑 같은 한자로 틀림이 없는데 어째서 말은  서로 달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까?”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