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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나주 이야기 - 51. 초동의 보산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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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승인 2008.05.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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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의 보산을 회상하며(憶草洞寶山)

村前道左視尋常  마을 앞과 길옆을 늘 보나니
風景依然物外鄕  풍경은 여전히 세속 밖의 마을이로다
大野中分半江水  큰 들은 강물에 의해 반으로 나뉘는데
烟霞長引小金剛  안개와 노을이 길게 소금강을 이끄네

시선선생은 나주에 살면서 여러 곳을 둘러 보았습니다. 아마도 절기에 맞는 행사나 친구들 간의 초대에 응하면서 자신이 다녔던 곳에 대한 풍경을 시로 읊은 곳이 여러 입니다.

초동에 대한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재의 보산사의 앞 들판의 모습과 당시의 들판의 모습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동 마을은 소쿠리형국으로 불리우는데 “세속밖의 마을이다” 라는 구절에서 맞아 떨어집니다. 다음 구절은 마을 앞의 다시평야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 백년이 흘렀으나 예전의 모습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에 그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 김종순 고대문화T/F팀장
현재 초동마을은 다시면 영동리 3구에 속합니다. 일명 샛골이라 불리 우는데 원래의 이름은 사동(莎洞)입니다 즉 바닷물이 유입되는 영산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모래땅에서 자라는 사초(莎草)가 많은 동네라는 뜻에서 사동이라 하였으나 어느 때 인가 초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적어도 사동이란 명칭은 1601년 제작된 「사동십호계첩」이란 명칭에서 확인되듯이 임진왜란 직후까지는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의 다시면은 조선후기에는 수다,시랑,죽포 3개면으로 이루워졌는데 초동은 수다면에 속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정명은 18세기 말에야 고착된 것으로 보이며 그 전에는 초동면이라는 명칭과 혼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2006 나주향토문화유산보고서)

또한

① 초동은 사이골이 변해서 샛골로 이후 한자로 표기되면서 사이가 새로 축약되고 새는 풀을 의미하여 풀초자를 써서 초동(草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② 1450년 함평이씨 9세손 이자보의 차남 이극명이 이곳에 정착할 때 주위에 억새풀이 많아 샛골이라 하였다는 설

③ 1912년경에는 추동(?洞)이라 표기하기도 했는데 이는 샛골을 한자로 하면서 새추자를 써서 추동이라 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초동은 원정, 아랫동구, 사촌, 응달로 구분되는데 1789년 『호구총수』에는 초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나주목 수다면 소속의 원정촌, 동구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나주시지 4권 540쪽 인용)

즉 시서선생 시대에는 초동이라 불리웠던 마을이 1789년에는 행정마을 단위에는 속하지 않았다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사실을 시서선생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게 합니다.

시에서 나타나는 보산은 당시에는 초동에 속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산에는 보산정사가 있는데 문화재자료 131호입니다.

한편 초동이 나주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는 것은 초동8현(초동팔문관)으로 일컫는 문과합격자를 잇따라 배출하면서 나주관내의 명촌 반열에 오르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8현이 의기투합하여 보산정사를 세우고 학문을 강마하고 후진을 교육 양성하였는데 보산정사는 동서분당을 전후한 1575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 됩니다. 8현의 행적을 기린 보산사는 1789년(정조22)에 세웠습니다.

초동8현은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 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 창주(滄洲) 정성(鄭詳), 한천(寒泉) 유주(柳澍), 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 금애(錦崖) 이언상(李彦詳), 남호(南湖) 유은(柳殷), 사촌(沙村) 최사물(崔四勿로 이들의 활동은 임란후 등장하는 초동동계의 원형이 되었으며 1601년(선조34) 사동십호계(莎洞十皓契)의 창설로 이어집니다.

이후 초동동계는 1663년 명칭이 향약으로 바뀌어 운영되다 1879년 운영이 중단되고 1897년 다시 중수되었으나 몇 년 못가서 흩어져 버렸다고 전해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제사를 지내오다가 해방 이후 동계가 재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나주향약은 1681년(숙종7) 금안동에서 시행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663년에 시행된 초동향약이 가장 오래된 향약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초동동계자료는 조선 중기 이후 사족의 향촌지배 활동과 관련하여 그 추이를 잘 보여주는 자료로 17세기 후반 수령권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주현향약(州縣鄕約)이 기존의 동계 동약을 바탕으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17세기 나주의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는데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료는 2006년 12월 31자로 나주시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초동팔문관은 대부분 1523년부터 1609년까지 살다간 인물들로 8현이 돌아가실 때 쯤 시서선생의 나이가 대체로 20 ~ 30대 후반에 이르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시서선생은 초동8현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장성하여서는 혹 만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는 60대에 쓰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 앞쪽에 정효성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시 내용을 보면 “마을 앞길을 늘보고 여전히 세속 밖” 이란 표현에서 보초동의 보산을 몇 번을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47세때인 광해군 시절에 상소를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과거를 못보게 제재를 받자 평생을 독서로 살고자 다짐하던 이 때에는 초동 8현은 모두 세상을 뜬지 10년이 안된 시절입니다.

한편 시서선생의 둘째딸은 1604년에 태어나 1619년 이익빈에게 시집갔는데 이분이 사시던 곳이 초동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저런 연유로 시서선생은 초동에 대해서 많은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유재란때 지도에서 피난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초동의 딸을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을 읊은 시를 소개합니다. 딸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너무도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가정의 달에 어울리는 시가 아닌가 합니다.


초동의 딸과 이별하며(別草洞女子)

林女先歸草女後  임동의 딸이 먼저 돌아가고 초동의 달이 뒤에 가는데
相分先後若爲情  서로 앞과 뒤로 나뉘는 것은 마치 감정이 있는 듯하네
留汝獨行心不定  너를 남겨두고 홀로 감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故遲汀畔待潮生  일부러 물가에서 머뭇거리며 밀물 몰려오기 기다리네

 

김종순  고대문화T/F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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