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자분이 전화를 하셨다. "굴착기는 굴삭기로 써야하고, 법에도 그렇게 돼 있다"는 말씀이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굴삭기'는 쓰지 말아야 한다. 일본말이기 때문이다.

일복에선 복잡한 '착(鑿)'자 대신 발음이 같은 대용 한자 '삭(削)'을 주로 쓰고 있다(일본에서는 둘다 〔사쿠〕로 읽는다).

우리에게는 원래 '굴삭'이란 말이 없었으니, 당연히 '굴삭기'도 없었다. 이는 1999년 이전에 발행된 사전들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1999년 말에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 우리 사전 가운데 처음으로 '굴삭'과 '굴삭기'를 실었지만 '굴삭'은 '땅파기'로 순화하고, '굴삭기'는 '굴착기'로 순화해 쓸 것을 권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굴삭, 굴삭기'는 '쓰지 말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어느 기계회사의 포클레인 상표가 '○○굴삭기' 인가하면, 전화한 독자분의 말씀처럼 우리나라의 법률(건설기계관리법)에조차 '굴삭기'가 보인다.

더군다나 어느 법령은 '굴착기'와 '굴삭기'를 각각 '광산기계'와 '건설기계'로 구분하고 있기조차 하다. 대한민국 국가기관인 국립국어원이 쓰지 말자고 하는데, 다른 정부 부처는 법률 조항에까지 공공연히 쓰고 있으니 손발이 안 맞아도 보통 안 맞는 게 아니다.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규탄대회를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렇게 우리말 속에 뿌리를 내리려는 일본말을 솎아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이진원의 '우리말에 대한 예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