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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들이 귀신을 좋아했던 것은 일종의 자구책이자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한라산 일대나 작은 하천은 말할 것도 없고 배가 뜨고
드는 포구마다 당집을 지어놓고 해신(海神)을 모셔왔다.
최부가 판옥선을 타고 갔던 조천관이나 한선을 타고 나주로 나갔던 별도포에도 해신당이 있다. 배가 드나드는 곳이 훤히 보이는 곳에 신사가
있는 것이다. 제주나 성산포, 광양 같은 곳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는 모두 항해할 때의 무사를 기원했던 소치이다. 표해나 침몰 같은 환난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극 정성을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단
하루도 항구에서 무사했다는 날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제는 어느 배가 표해 되고 오늘은 어느 배가 침몰되었다는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전능한 신이 했다고 보아야 할까? 인간의 틈새에 끼여
벌을 내리고 해롭게 한 신이 노해서 방해를 하기 때문일까? 제사를 지내면 복(福)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틀린 것이다.
수정호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최부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는데도 만약 영험이 있었다면 경차관 한 사람 때문에
다른 40여명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다. 최부는 조심스럽게 말을 매듭지었다.
“우리가 탄 배가 못쓰게 되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든 것은 전적으로 바람을 잘못 만난 것이다. 제사에 의지하고 대가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그런 제사만큼은 앞으로도 지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든 제사를 제주 인들이 쉽사리 포기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선장을 비롯한 수정호 대부분의 선원들은
최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제주인의 고초와 힘든 해상에서의 일상을 무시한 것이라며 냉소적으로 비꼬는 눈치가 역력했다.
산신과 해신은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주는 신(神)일뿐 그들이 한일을 궁시랑 거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나주에서부터 최부를 따라왔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제사는 제사일 뿐 수정호의 안녕이 더 큰 문제였던 것이다.
이날은 흐리고 바다 색이 붉은 색을 띄기 시작했다. 대륙의 붉은 황토를 갈아서 씻어내는 양자강의 물줄기가 바다에 이르렀다는 신호다.
시커먼 황색이 바다를 물들였다. 바다물의 색으로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중국의 연안 양자강의 이남지방이나 중국동 해안의 근해
수역으로 짐작된다.
불어오는 동풍에 밀린 배는 서쪽으로 나아간다. 일행 중에 물이 좋지 않아 질병에 시달린 자로는 박종희, 만산, 이산 등은 병치레를 겪으면서
고생하고 끝없이 시달렸다.
고보종, 양달해, 고회, 김조회, 임산해 등은 배를 탄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리에 드러누운 채 이런저런 작업을 독려해도 듣는 둥 마는 둥 나
몰라라 했다. 배에 오른 첫날부터 거의 날마다 뱃속의 것들을 토하면서 탈진해 버렸다.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실, 부명동, 김득시, 강유, 송진, 김속, 강내, 오산, 고내을동 등은 모로 두러 누운채 열 번을 불러도
한번이나 대답을 하며 속을 태웠다. 좁은 배 안에서 부지런히 일을 해 오다가도 밤만 되면 손을 놓고 노는 자들도 있었다. 초근보, 김괴산,
고복, 김송, 김석귀, 이효태, 김진산, 등이 그랬다. 그들이 하는 일은 처음에는 그럴듯했지만 끝에 가서는 흐지부지 되고 만다. 초지일관이 되지
못했다.
수정호는 중국근해 수역으로
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만 해온 자들도 있었다. 허상리, 권산, 김고면, 김구질회, 최거이산, 김도종, 고이복, 문회,
현산, 한매산, 권송, 막쇠 등은 밤낮이 따로 없이 열심히 일했다. 남들이 모두 게으름을 피워도 그들은 자기 일에만 몰입했다.
특히 목수 이상으로 목공에 능숙한 이들은 물이 세는 곳을 찾아 땜질을 해온 자들이 있어서 물이 차 오르는 배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의 빠른 손놀림이 배를 구해준 것이다.
큰 파도가 쓸고 가면 배가 삐거덕거리며 뒤틀린다. 그럴 때마다 물이 스며드는데 만약 그들이 틈새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수정호는 물 속으로
이미 가라앉았을 것이다.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 이효지, 안의 등이 배를 지킨 주인공들이었다. 발 빠르고 재치 있는 목공 솜씨가 배를
지켜준 것이다.
날강도들을 만나 배 안의 노까지 빼앗기고 만 사태에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사라지고 절망뿐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일 때도
있었다. 망망대해로 내몰리는 벼랑 끝에서 잡고 있던 지푸라기마저 떨어져버린 꼴이었다.
파도에 지쳐 이미 죽은 몸인데 이번에는 날강도 때문에 다시 한번 더 죽는 꼴이 되었다. 썩은 시체에 칼질한 격이다. 살아야 갰다는 의지가
무디어간다. 먼바다로 밀려나갈수록 수정호의 곳곳이 물구멍이다. 급한 대로 더덕더덕 덧대어 붙인 판자로 못질한 배가 상처뿐이었다.
수정호는 사나운 파도에 휘청거리는 충격을 받아 배안 어느 곳이고 온통 구멍과 상처투성이라 수시로 못질해서 막고 터지면 또 막곤 했다. 작은
구멍으로 흘러든 물은 조금만 방심하면 밑바닥에 차 오른 물로 무릎까지 빠진다.
벌어지고 터진 곳을 막았지만 수시로 뚫리고 갈라진 틈새로 스며드는 물을 여러 사람들이 돌려가면서 힘을 합해 퍼내고 또 퍼내야 한다. 지칠
때까지 좁은 곳에 엎드려 물을 퍼내고 잠시 쉴 때는 대신 다른 사람이 쉬지 않고 바통 터치해서 물을 퍼내야 줄어든다.
최부가 한탄하듯 말했다. “물도 새고 뱃사람들도 의욕을 잃어버려 갈팡질팡 허덕인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마침 이 소리를 들은 정보와 함께 6명이 발 벗고 나섰다. 구경만 하던 허상리 등 10여명도 릴레이식으로 물푸기에 매달렸다. 마침내 고인
물의 밑바닥이 보이고 침몰의 위기를 벗어났다.
밤이 되자 바람은 잔잔해졌지만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선원들의 걱정 속에 수정호는 어느 커다란 섬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늘이 도운
천재일우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섬에 닿았던 배가 다시 밀리며 급한 조류의 물살을 탔다.
빠지는 물살로 섬에 정박하려 애를 썼지만 맘대로 되질 않았다. 갈 곳을 잃은 수정호는 다시 바다 위를 떠다녀야만 했다. 혹독한 시련이요
고달픈 아픔이다. 더 큰 고통은 지금 수정호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서러운 것이다.
고비마다 위기의 순간을 넘겨온 수정호의 끈질긴 저력이 위안이고 유일한 희망이다. 섬이 있고 바닷물의 색깔이 검붉은 황토색인 것으로 보아
중국대륙의 연안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살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꺼져 가는 촛불의 가느다란 희망인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