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우리에게 하니자는 빛이자 어둠이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일을 기록할 수 있는 고마운 문자였지만, 달리 보면 소수의 특권층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런 한자를 우리가 써온 지 수천 년이 지난 지금, 한자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그 흔적들은 남아 우리 말글살이에 헤살을 놓는다. 골이 깊어 그늘도 짙은 것인가.

‘고개나 허리를 자꾸 가볍게 구푸렸다 펴는 모양’을 흔히 ‘굽신굽신’이라고 한다. ‘굽신거리다. 굽신대다’라는 표현도 쓴다. 아마 ‘굽신’의 ‘신’을 ‘신(身)’쯤으로 생각한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일 게다. 그러나 ‘굽실굽실, 굽실거리다, 굽실대다’로 써야 옳다. 이 말들은 한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순 우리말이다.

한자의 영향 때문에 잘못 쓰기 쉬운 말로는 ‘희죽희죽’도 있다. 아마 ‘웃음’이라는 생각에 ‘喜죽喜죽’이 연상돼 그렇게들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 역시 한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족스러운 듯이 슬쩍 자꾸 웃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는 ‘히죽히죽’이다. 그보다 귀여운 말은 ‘해죽해죽’.

‘아픈 사람이나 해산한 사람을 간호하는 일’을 일러 ‘구환’이라고들 한다. 역시 ‘求患’쯤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사실 이 말의 뿌리가 ‘求患’이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구완’으로만 써야 한다.

비슷한 것들로는 ‘미류(美柳)나무, 주착(主着)없다, 지리(支離)하다’가 있는데 이것들 역시 이제는 ‘미루나무, 주책없다, 지루하다’로 써야만 옳다. 한자어에서 온 말임을 알면 되레 헷갈리는 말들이다.

그러고 보며 ‘근본 없다’는 표현 역시 한자시대의 유물이 아닌지….

(이진원의 ‘우리말에 대한 예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