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긴 최부는 부끄러움도 사라졌다. 참기 힘든 아픔과 분함에 악을 썼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그들은 최부를 다시 풀어주면서 방금 한 말을 글로 써보라고 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최부는 글로 써서 강도에게 주었다. 그때야 알아차린 그들은 노발대발하며 크게 화를 냈다.
 
또 다시 최부를 무차별로 두들겨 팼다. 손에 잡히는 아무것이건 닥치는 대로 휘두르며 두들겼다.

매타작이 끝나자 기진맥진한 최부는 실신해서 간판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흐느적거리며 넘어진 최부를 바닥에 앉히고 물을 퍼부었다.

풀린 눈을 다시 뜨자 또다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매질은 계속되었다. 지독한 매질이다.
 
조선의 엘리트 관원이 처참하게 무너진다. 겨우 눈을 뜨고 말똥거리는 최부의 기다란 머리채를 움켜잡은 강도는 배 바닥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더니 배의 가운데에 있는 돛을 올릴 중심기둥에 거꾸로 매달았다. 벌어진 입에서는 붉은 피가 낭자하게 흘러내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하체까지 늘어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다. 몽둥이질을 해대던 자가 제힘에 지쳐 자리에 앉았다.

날강도의 두목이 가지고 있던 작두를 높이 쳐들었다. 단번에 최부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무서움에 떨며 딴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꽈당 쿵쿵."

겁에 질린 눈을 다시 뜨자 기둥에 묶여있던 최부의 목은 달린 채로 그대로 있었다. 하늘이 도와준 것이다.

무거운 작두는 조준이 빗나가고 기둥을 치면서 갑판위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최부의 목을 치려했는데 잘못해서 오른쪽 어깨 끝을 친 것이다.

작두의 날이 위쪽에서 날름거린다. 강도는 다시 손바닥에 마른침을 바르며 작두를 집어 들었다.

"요번엔 단번에."
 
이번에는 틀림없이 칠 듯 벼르면서 올려든 작두가 시퍼런 날을 번쩍인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강도의 손이 아래로 휘저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다.

그때 날강도의 무리 중 가장 나이를 많이 먹은 자가 작두를 든 자에게 다가서서 그의 손을 막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강도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다투듯 지껄이더니 서로 소리를 높여 다퉜다. 그들이 하는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운 광경에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다만 나주에서부터 함께 행동해온 김중과 최거이산이 오더니 날강도의 두목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비면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우리의 경차관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죄라면 바다를 이겨온 죄밖에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작두의 날 앞에선 그들의 애원이 하늘에 닿았던지 강도들의 폭거가 멈췄다. 강도들은 배 안의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어렵게 만든 수정호의 돛과 노를 끊어버리고는 바다 속으로 던져 버렸다.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서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강도들의 무리가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울부짖었으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무지막지한 만행이다.

배의 기능을 상실한 수정호

갑자기 강도의 두목이 최부를 향해 발길질하더니 무리를 이끌고 나가려고 했다. 그들이 끌고 왔던 배의 줄을 풀고 난 다음 도둑의 배로 올라갔다. 날강도들은 쏜살같이 배를 빠져나갔다.
 
저항한번 해보지 못한 수정호만 물위에 둥둥 떠서 대양 속으로 버려지고 말았다. 이미 늦은 밤이었다.

수정호는 물위에 떠있을 뿐 노도 돛도 없어졌으니 배가 아니라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겨우 뭍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바다로 내쫒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비극적인 수정호의 운명이다. 다행이 날강도들이 한바탕 쓸고 간 배는 크게 망가졌지만 최부 일행은 부상을 당하거나 죽은 자가 없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도적질을 하러 왔으면 물건들이나 훔쳐 갈 일이지 무슨 놈의 원수가 졌다고 배까지 못쓰게 만들어버린단 말인가. 도둑질이 아니라 살인행위나 진배없는 무지막지한 짓거리다.

날은 흐리고 강한 서북풍에 수정호는 다시 망망대해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배 안에 있던 쓸만한 옷들은 모두 빼앗기고 짠물에 젖은 옷뿐이다. 찬 겨울밤의 낮은 기온은 견디기 어려울 지경으로 춥기만 하다.
 
젖은 옷을 한곳에 모았다. 권송, 강내가 축축하게 젖은 옷을 발로 밟아대기 시작했다. 물기를 뺀 다음 툴툴 털어 한 겹씩 더 걸쳐 입어야 했다. 물기가 덜 빠졌지만 추위를 이길만한 방법이 따로 있을 수 없어서 무작정 껴입은 것이다.
 
어두운 밤인데다 설령 낮이 된다 해도 날씨가 흐리다면 말릴 수도 없으므로 몸의 더운 열기로 말린 심산인 것이다.

너무 추운 날씨는 생사람을 얼어죽게 한다. 껴입은 옷은 당장에는 추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온에 의해 서서히 말랐다.
 
겨우겨우 고치고 손질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바다로 내몰리다니 어이가 없었다. 배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소중하게 아끼고 감춰두었던 쌀까지 몽땅 털렸다.
 
날강도들은 수정호의 모든 것을 가져갔다. 또 바다에 던져 버렸다. 배 안의 먼지까지 훔쳐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굶어죽을 판국이다. 아무리 험악한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난파선에서 도둑질을 하다니….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거리다. 손을 잡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까지 깬 격으로 너무한 처사라 하겠다.
 
날강도들은 도가 넘는 못된 짓을 저질렀다. 돛에는 큰칼을 휘저어 갈가리 찢어버렸다. 배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행여나 자기들을 관서에 신고하거나 쫒아가 잡을까봐 수정호의 발목을 비틀어 버린 것이라 하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 안에 있는 여러 가지들 중에 쓸만한 것들은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정처 없이 떠다니다 배 안에서 죽든, 배가 암초에 부딪쳐 깨지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막무가내의 억한 심정인 것이다.
 
임시로 만든 돛 역시 바람에 찢겨서 배는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니고 파도에 떠밀려 다녔다. 갈 곳이 없는 일엽편주가 된 것이다. 수정호는 어디로 갈지 모래톱에 얹혀질지 암초에 부딪혀 깨지고 말지 알 수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