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작은 거인'같은 모순어법은, "시집 안 갈래요"나 "밑지고 팝니다"나 "어서 죽어야지"처럼, 뻔한 거짓말에 속한다. 서로 진실이 아닌 줄 알면서 하거나 듣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엔 자기도 모르게 하는 거짓말도 많다.

덫에 걸린 호랑이의 생채기 사이로 다리뼈까지 보였다.

바로 이런 말이 그런 거짓말이다. '생채기'는 '손톱 따위로 할퀴어지거나 긁히어서 생긴 작은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깊은 생채기'라는 말은, 괜히 '상처'를 멋스럽게 표현하려다 되레 피해가 크지 않다고 강조하는 셈이 된다.

 '곰의 습격을 받아 여러 군데 생채기가 난 채 죽어 있는 사람'이라면 심한 상처나 출혈 따위로 죽은 게 아니라 십중팔구는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다. '이별의 생채기'라면, 헤어진 다음날쯤이면 바로 딱지가 앉을 정도로 상처가 가볍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진도 5.5의 강진强震'도 거짓말이다. '진도震度'는 소수점이하 자리는 표시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거짓말에 속한다. 소수점 아래 첫 자리까지 쓰는 것은 '리히터 규모'다. 줄여서 '규모'라고만 해도 된다.

규모와 진도는 언론에서조차 자주 헷갈려하는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규모는 절대치고 진도는 상대치다. 다시 말하자면 규모는 '크기'이고, 진도는 '세기'인 것이다. 즉 도쿄에서 '규모 5.5'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어느 곳에서든 이 지진의 규모는 '5.5'이지만, 이 지진의 진도는 부산에서 '3'쯤 되고 베이징에서는 '1'쯤 되는 식이다.

(이진원의 '우리말에 대한 예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