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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나주이야기 - 23. 죽사에서 감회를 깃들이다
김민주 기자  |  minjukk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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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호] 승인 2007.08.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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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扶藜杖任彷徨  홀로 지팡이 짚고 내키는 대로 쏘다니면서
不覺沈吟已夕陽  나도 모르게 깊게 읊조리다 이미 석양이 되었네
霜晩小磎楓欲染  서리에 저무는 작은 시내는 단풍이 물들려하고
雲歸半嶺竹生凉  구름 돌아가는 산마루에는 대나무에 서늘함이 이네
兩州共設雌雄地  두 고을에서 함께 자웅을 겨루는 장을 마련하니
多士空煎勝負腸  많은 선비들이 그저 승부의 애를 태우네
俯視人間成一嘯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휘파람 한번 부나니
偸閒此亦采眞鄕  한가함을 타는 것 또한 참된 마음을 취함이라

   
▲ 김종순 고대문화T/F팀장
이 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입니다. 시 내용에서도 약간 감을 잡을 수 있으나 부연설명 없이는 곤란합니다. 약간의 감을 주는 단어는 방황입니다.

이 시가 실려 있는 시서유고에서 선생은 1634년 윤 8월 18일 광라전예(光羅戰藝)를 설치하자 이 행사를 피해 죽사란 절로 가서 깃들었다. 시길(선생의 아들)이 표로서 삼상의 으뜸을 차지하였다. 시관은 감사 원두표, 나주목사 홍득일, 광주목사 심연, 무안현감 신집, 장흥현감 맹씨였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있으니 감을 잡을 수 있겠죠 373년전 나주에서 열렸던 요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백일장입니다. 전라감사 원두표가 중심이 되어서 열렸던 백일장에 선생의 아들도 참가하였는데 이놈이 등수에는 들었는지 몹시도
염려가 되었을 것 아닙니까 ?

또한 선생이 당시에는 나주고을에서 가장 학식이 깊은 선비의 한분이었는데 누집자식이 이번에 참가했는데 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이 행사를 주관한 원두표 감사는 3년전에 나주목사를 지낸 분으로 선생과도 친분이 많은 분입니다.

저는 1897년에 개인들이 발간한 금성읍지의 내용 중에 나주전예문이란 글을 봤는데 시서선생의 시에서 당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에서 약간의 희열을 느낌니다. 나주전예문은 조선시대 당시 나주와 광주 양쪽 고을의 선비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글자랑을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시서선생이 그리고 잇는 광라전예도 같은 성격의 행사이지만 최초로 시도된 것은 이보다 빠른 21년 전인 16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주전예문을 보면 생원 진경문이 양고을 간에 한번 겨루자 하면서  1611년에 글을 광주로 보내자 광주에서는 진사 고의후가 글을 써서 그렇게 합시다 하니 1612년 나주에서 행사가 열렸습니다.

당시 행사가 열린 곳은 지금 복원공사 중인 금성관의 동익헌 벽오헌(碧梧軒)의 동쪽에 있었던 무이루 서쪽에서 나주도회시(羅州都會試)를 열었던 것입니다. 당시 도회시관은 나주목사 가운데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한 박동설 목사와 광주목사 박경신 그리고 경현서원 초대원장 정개청에게 과거를 정거 당했다가 늦게 소과에서 장원 급제한 홍천경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주목객사 공간이 예전에 얼마나 중요한 장소였음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시서선생의 아들 시길이 당당하게 으뜸을 차지한 1634년의 광라전예는 1612년의 전통을 이어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관이 전라감사로 격이 높아진 것도 보이십니까 ? 이번 영산강축제에 이러한 선조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판 백일장을 한번 기획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죠

그런데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왜 조선중후기로 가면서 이러한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을까요 나주전예문에도 언급이 되어있지만 전쟁지변으로 예원(藝苑) 적막하여 문제다 이런 의견입니다.

그러니 양 고을이 전예를 열어 부흥시키자 라는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게 변해버렸습니다. 특히 기득권층의 불충실한 역할은 모든 면에서 재검토가 필요 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선비들의 힘을 모으고 흩어진 지역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전쟁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치유하는 방편의 하나로 시회가 지속적으로 열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참 죽사란 절은 송월동 당시는 흥룡동에 있었던 절인데 지금은 자취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가마솥더위입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 있겠습니까? 새벽의 바람은 가을입니다.

김종순  고대문화T/F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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