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용식 공학박사·건축기술사·수필가

일상이 무료하거나 글이 풀리지 않을 때 가끔 찾는 곳이 있다. 집 가까이에 있는 대학교 식물원이다. 17만 평쯤 되는 크지 않은 규모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아 볼거리가 많다. 복잡한 주말보다 좀 한가한 평일에 찾는다.

나는 ‘가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계절이 가고 오는 네 계절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눈 쌓인 겨울 풍경이 고즈넉하고 아늑해서 제일 좋았던 것 같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거나 음악을 들으며 노트북을 열어놓고 글을 쓰기도 한다. 아는 지인들과 이곳에서 만나기도 한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는 친구나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표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 준다. 글솜씨 좋은 후배와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코치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함께 차를 마시고 식물원 산책에 나선다. 스스로 속내를 털어놓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힐링의 공간이다.

오늘은 밀린 원고도 정리할 겸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섰다. 식물원은 겨울의 끝자락이어서인지 한가하다. 커피잔을 앞에 놓고 창밖을 본다. 중앙광장에는 조그만 화분에 겨우내 온실에서 가꾼 꽃들을 조그만 화분에 담아 전시해 놓았다. 올망졸망한 원색의 꽃들이 따뜻한 햇볕을 쬐면서 서로 조잘대고 있는 것 같다.

봄을 기다리다 좀이 쑤셨는지 롱부츠에 빵모자와 가죽 재킷 등 제각각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진작가(그녀들의 카메라를 보고 그렇게 인정하기로 했다) 몇의 몸놀림이 진지하고 바쁘다. 쭈그려 앉거나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옆에서 고개를 꼬면서 온갖 포즈를 잡고 열심히 셔터를 눌러댄다. 그녀들의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꽃들이 웃으며 포즈를 잡아주고 있다. 일, 이~~하며 더 크게 웃는다.

나도 콧바람도 쐴 겸 산책길에 나섰다. 아직은 썰렁한 기운이 가득한 수목원에 튤립과 작약이 흙 속에서 얼굴을 내밀며 기지개를 켠다. 설강화 하얀 꽃잎이 눈꽃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름처럼 예쁘고 앙증맞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고 저마다 순서를 지키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연의 순환은 어긋남이 없다. 몇 차례 다녀온 천리포 수목원의 규모와 내용에서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집 가까이 이러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왜 사람들이 숲세권, 역세권 하는지 실감하고 있다. 식물원은 숲세권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지?

오늘은 봄마중을 준비하려나 보다. 옷차림이 둔해 보이는 여자 인부들 몇이 산책로 작업을 하고 있다. 야자매트 위에 쌓인 젖은 낙엽을 갈퀴로 긁어모아 포대에 담고 있다. 지난가을에는 황혼이었을 낙엽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인생이 나뭇잎처럼 떨어지고 나면 어디로 갈까.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가 봄이 오면 나는 무엇으로 다시 오게 될까. 꽃으로 나무로 아니면 두꺼비가 되어 오는 것은 아닐까.

“좀 도와드릴까요”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인데 아무 대답이 없다. 지나가던 남자가 느닷없이 말을 거니 순간 답이 궁했을까. 그냥 옆에 있던 마대를 들어 포대 입을 벌려주니 그제야 내 행동을 이해했는지 젖은 낙엽들을 욱여넣는다. 포대가 가득 차자 포대를 모아 놓은 자리로 옮겨다 놓았다. 다시 다른 포대 입에 낙엽을 담아 옮겨 놓기를 몇 차례 반복하자 그때야 한마디 한다.

“손이 더러워졌을 텐데, 고마워요” “씻으면 될 텐데요 뭐.” 그냥 순간적인 충동으로 한번 해 본 일인데 공치사를 들은 것 같아 쑥스럽다. 다시 짙푸른 맥문동을 가리키며 물었다. “맥문동꽃은 언제 피죠?” “봄 끝 무렵에 보라색으로 피는데 참 예뻐요.”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인데 꽃피는 것을 왜 한 번도 못 보았을까.

꽃샘추위 때문인지 길옆 나무들의 동면(冬眠)이 길다. 막대기 하나를 주어 툭툭 건드리며 잠을 깨웠다. 봄을 재촉하는 인간의 조급증을 보고 눈을 흘길는지 모르겠다. 산책길을 내려와 ‘저 꽃들 사랑인가 하여하여’ 들꽃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갤러리‘우촌’에 들렀다. 전국의 바닷가와 계곡, 들판의 야생화를 찍은 여덟 작가의 사진에 들꽃 시인 김창진 씨가 시를 입혔다. 내가 한때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인지 눈 떼기 힘들게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자연 속에서 의미 있게 존재하는 꽃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 전국의 산야를 돌며,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았을까. 그들의 다음 출사(出寫) 때 나를 좀 끼워달라고 부탁해 볼까? 전시회 제목과 같은 시집 한 권을 사서 갤러리를 나서는데 함께 따라오는 시와 사진이 있다. ‘동강할미꽃’이다.

바위 물결에 / 떠내려 오다가 / 용하네 / 용암이 어찌 / 꽃송이 셋을 / 피울 수 있지 / 태양의 그늘 / 저 치마 무늬 / 니사금尼斯今 / 뿐이랴

식물원의 봄은 더디게 오는데 봄꽃 사진과 시들이 앞질러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