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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대 규모의 객사客舍 나주 금성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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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호] 승인 2024.03.10  22: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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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순(전 나주시청 문화예술과장, 학예연구관)

지난 호에 이어서 금성관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겠다. 나주 객사 금성관은 당시 나주목에 있어서 가장 권위있고 왕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객사의 가운데 건물인 정청 안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하던 지방의 궁궐이었다. 양쪽의 익사 건물은 중앙에 나주에 온 사신들의 숙소로 활용되었다.

나주객사는 정문인 망화루와 중삼문 내삼문 그리고 정청인 금성관과 동익헌 바로 옆에는 무이루가 있었다또한 객사 운영에 필요한 시설과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공간이 있었다. 최근에 금성관 정비 복원 사업을 하면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동익헌(벽오헌) 바로 옆에서 400여평에 이르는 직사각형의 연못이 발견되었다. 연못에서는 정자의 난간부재와 지붕기와 도자기 파편 단면에 사람의 이름을 적은 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객사공간의 일부가 민간에게 넘어가면서 민가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이러한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대형의 연못터가 발견되자 동네 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예전에 민가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매번 연탄불이 꺼져버려 자주 이사를 갔는데 연못을 보니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해소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객사 공간에는 나이든 은행나무와 붉은 느티나무가 있으며 비교적 최근에 심은 소나무와 회화나무 등이 있으나 원래는 조경이 제대로 꾸며져 있었을 것이다.

1976년 금성관을 해체 보수할 때 전통복장을 갖추어 입은 많은 어른들이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금성관 대들보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기 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김일경 옥사를 일으켜 소론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때 훈련대장 윤치상이 죽고 아들인 윤지는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이배되어 20여년을 살았다.

1727년 노론 일부가 실각하자 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관계된 사람 가운데 나숭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숭대는 항상 옷고름이 짧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날따라 다른 옷을 입고 나가 관군에게 쫓기자 금성관 대들보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이때 긴 옷고름을 숨기지 못하여 잡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는데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대들보에 사람이 숨을 정도의 공간이 파여있는지 보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결론은 대들보는 멀쩡했다.

시간이 흘러 나주에 귀양와 있던 윤지는 17551월에 객사 정문인 망화루 기둥에 괘서를 붙였으나 전라감사 조운규에게 체포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고 3월에 죽었다. 이 사건으로 나주목사 이하징과 더불어 많은 소론인사들이 피화되었다. 이때 금성관 현판글씨를 쓴 사람으로 거론되고 있는 이광사도 원찬되었다,

한편 1884년 조선에 파견된 미국 공사관 무관으로 대리공사를 역임한 조지포크(한자이름은 福久)11.1~12.14까지 44일 동안 우리나라 남부지역을 조사하면서 1115일 나주에 도착하여 17일 남평을 거쳐 광주로 갔다. 당시 포크는 북문을 통해 읍성 안으로 들어와 객사로 안내되어 이곳에서 묵었다.

포크가 16일 아침에 받은 음식은 사각형 상(나주반)에 꿀에 절인 신 오렌지와 죽순, 얇게 저민 삶은 달걀, , , 얇게 썰은 차가운 쇠고기, 껍질을 벗긴 밤, 김치 한 접시, 쇠고기가 섞인 잡채, 국수, 께와 정과 한 접시, 꿀과 식초, 소주를 담은 놋쇠주전자 였다.’(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231) 포크는 같은 책에서 나주사람들이 매우 부드러운 타원형의 얼굴과 준수한 용모를 가졌으며 무척이나 잘생겼고 보통의 조선인보다 더 작고 동그란 매우 검은 눈은 가졌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포크가 나주에 왔을 때 목사는 박규동이었다.

나주객사 금성관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재판소로 이후에는 나주군청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원형에서 많은 변형이 있었고 1976년에 중수하였으나 여전히 창호를 사방으로 설치하여 제대로 원형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76년 보수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 당시 군수는 보수하는 것에 뜻이 없었으나 고인이 되신 정윤국 선생이 나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임으로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금성관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원형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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