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 간이역에서 만난 문학작품
삐거덕 나무 구름다리 송정리역(광주송정역) (1)
나주투데이  |  njt2001@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869호] 승인 2023.12.17  21:24:2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 김채석 기행작가

내가 유년을 보낸 곳은 소읍으로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시골도 아닌, 조금은 어정쩡한 곳으로 송정리라는 곳이다. 출신 예인으로는 국창 임방울과 ‘떠나가는 배’로 대표되는 시인 용아 박용철의 고향이다. 

지금처럼 국민이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방식이 아닌, 유신헌법의 수임적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전두환이 장충체육관에서 두 명 기권 외 전원 찬성이라는 전무후무 압도적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난 후 송정읍이 송정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뜬금 자칭 보통사람이라는 노태우의 시절, 졸지에 광주시 광산구로 편입되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광산구라는 이름보다는 그냥 송정리라 부른다. 그렇게 송정리라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이 간직하는 풍경으로 황룡강을 건네는 뽕뽕 다리, 하남으로 넘어가는 눈물의 아리랑고개, 솥부리 공장과 천일연탄공장, 우시장이 번성한 오일장, 송학주조장과 서부주조장, 천일예식장과 명신예식장.
 
영광으로 가는 유일의 길목 영광통, 열차 습격으로 굶주린 배를 채운 신덕마을, 봄이면 광송 간을 잇는 아름다운 벚꽃 길 등. 이러한 송정리에 대표하는 번화가가 있다. 지금은 송정2동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서울의 명동이나 강원도 춘천의 명동과 같은 이름의 명동이었다. 이 중에서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환도 이후 박인환이나 이봉구, 전혜린, 나애심, 오상순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취했던 곳 서울 명동. 
 
그 명동에서 태어난 음악이 박인환의 생애 마지막 시가 되고 노래가 된 명동의 샹송 <세월이 가면>이 있듯, 송정리의 명동에는 840번지에 초원다방이 있었고, 주변에 송정 극장이 있었고, 스타 양장점이 있었고, 야구선수 선동열이네 아버지 집이 있었다. 빵집에 여학생을 만나러 가거나, 흑백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사진관에 가거나. 책방에 참고서를 사러 가거나, 양화점에 구두를 맞추러 가거나, 양복점에 옷을 가봉하러 가거나,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심지어 젊은 객기를 부리다가 유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본식 붉은 벽돌집의 경찰서도 모두 명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그런 명동 길에 잊히지 않는 풍경이 있다. 바로 솜사탕 리어카를 밀고 가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칼을 갈라고 소리치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초근목피도 연명하지 못한 사람처럼 겨우 입 밖으로 흩어지고, 얼굴엔 버짐에 머리엔 된통 부스럼투성이에 무거운 아이스깨끼(아이스케이크) 통을 울러 맨 소년의 목소리 또한 배고프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에 구두닦이 소년의 누런 콧물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솜사탕 아저씨는 전파사 앞을 지날 때마다 스피커 통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나와 친구들은 그 아저씨를 볼 때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솜사탕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지루박(지르박) 아저씨라고 불렀다. 솜사탕 리어카를 밀고 가면서도 음악이 흘러나오면 리어카는 파트너가 되었다. 스텝을 밟는 발놀림도 현란했고 혼자서 턴을 하는 모습은 한 손을 높이 들고 크게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목에는 종기가 아물지 않는지 언제나 이명래 고약이 붙어 있었다. 지금 송정리는 당시와는 달리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하지만, 나의 풍경은 지루박 아저씨에 멈춰있다.
 
지르박과 같은 사교춤은 요즘이야 스포츠 댄스니 해서 부부가 함께 추는 하나의 레크리에이션 정도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네 여편네는 춤바람이 났다느니, 누구네 마누라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카바레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하며 소문도 무성했다. 한때 제비족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이들에게 잘못 인연이 되면 돈 잃고, 가정 잃고 했던 건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 사실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사회적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휴전 이듬해인 1954년 1월 1일부터 신문에 연재된 소설가 정비석의 작품 『자유부인』에서 다루고 있었다. 
 
오영수 문학 『갯마을』에서 해순이의 원시적인 이야기로 바닷가의 질펀한 삶의 애환과 서민적 서정을 다루었다면, 정비석은 8.15 해방 이전에는 순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통해서 깊은 산속에서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토속적인 건강함을 『성황당』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랬던 작가는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퇴폐풍조와 함께 도덕적으로 상실되어 가는 애정 윤리에 일침을 가하고자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교 사상과 함께 지배해 온 봉건적 질서는 여성에게만 모든 것을 강제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자 귀신은 없다. 결국, 여자 귀신뿐이라는 것은 여성의 한을 표출 또는 보복. 앙갚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하듯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는 경술국치와 함께 신여성이나 모던 걸이라는 이름으로 탈 봉건화 되었고, 그러면서 전통적 가치관도 하나둘 붕괴되었다. 이때 시대로부터 너무나 앞서나갔거나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여성들 있었는데 나혜석이나 윤심덕과 같은 여성이다. 
 
그러다가 한국전쟁과 함께 미군 문화가 급속 유입되면서 과도기적 혼란을 겪게 된다. 바로 정비석이 이야기하는 『자유부인』이 그것이다. 너무나 오래전에 읽은 기억을 유추해 보면, 국문학과 교수의 부인은 떠밀리듯 동창회에 참석하면서 양품점에 취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사회의 물결 속에, 남편의 제자와 사교춤을 추러 다니다가 탈선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가정파탄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남편의 이해로 다시 한 가정의 정숙한 부인으로 안정시킨다. -계속-
나주투데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45. 다시면 운봉1리 백동·백운마을
2
미술관 천장에서 물이 뚝뚝
3
진정한 용서란 한발씩 발걸음을 떼어놓는 여정
4
나주혁신도시 주민 괴롭혀 온 '악취' 이렇게 해결했다
5
굿바이 어린이집?
6
영산포 홍어 거리 ‘자율상권 구역’ 지정
7
5월25일 나주 락 페스티벌 전국 13개 팀 나주에 온다
8
정도전의 유배지 소재동?
9
영산강변 붉게 수놓은 꽃양귀비
10
“홍어 맛보GO” 영산포 홍어축제 팡파르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전남 나주시 빛가람로 685 비전타워 206호 나주투데이  |  대표전화 : 061)334-1102~3  |  팩스 : 061)334-1104
등록번호 : 전남 다00334   |  발행인 : 윤창화  |  편집인 : 이철웅  |  e-mail : njt2001@hanmail.net
Copyright © 2013 나주투데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