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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걷다 보면
송용식 수필가  |  songys8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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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승인 2023.11.26  20: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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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학박사·건축기술사·수필가

처음 맨발 걷기를 하자고 아내와 함께 근처 운동장으로 갔을 때다.

“난 더 못 걷겠어.” 몇 걸음을 걸어 본 난 견딜 만했는데 아내는 아프다고 했다. 내 발바닥이 아내보다 더 두꺼워서일까. 아님 말초 신경이 둔해서일까. 그래서 요즘은 혼자서 걷는 날이 많다.
 
건강에 좋다고 해서 맨발 걷기를 시작했지만 막상 걷다 보니 사유할 수 있는 시공간이 생겨서 더 좋았다. 여러 생각이 들고 나면서 얽힌 것들이 가지런해지기도 한다. 하나의 주제에 깊이 침잠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기회도 된다. 넓게 파다가 또 좁고 깊게 파 보기도 하는. 
 
내 발바닥은 왜 아프지 않을까. 가느다란 모래알이나 조그만 돌멩이가 밟힐 텐데도 별다른 통증이 없다. 있더라도 야릇한 쾌감까지 느끼는 무감각의 감각이다. 어디를 어떤 곳을 얼마나 싸돌아다녔길래 이리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두꺼워진 것일까.
 
그러고 보니 아내의 발바닥도 참 이상하다. 대한민국의 억세고 극성인 아줌마를 지나 할머니가 되었으면 무뎌질 만큼 무뎌졌을 텐데 말이다. 
 
문득 발바닥의 두께에서 내 얼굴의 두께로 생각이 다다른다. 후안무치(厚顔無恥).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염치없이 군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극히 경계하면서 조심스러워하는 말이다. 두 두꺼움 사이에 뭔가 켕기는 것이 있었는지 서둘러 생각을 접고 싶었다.
 
나의 부끄러움의 두께는 어느 정도일까. 부끄러움은 분명 사람의 약점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의 큰 미덕이기도 하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윤동주가 가장 높은 곳에 둔 가치. 누군가가 나의 부끄러움을 마주하고 슬그머니 외면해 주지는 않았을까. 그조차 눈치 못 채는 감각의 두께는 아닐까.  
 
한 걸음씩 땅바닥을 딛다 보니 ‘바닥을 친다’라는 말에 생각이 미친다. 내 몸에서 가장 낮은 곳. 또 더 내려갈 곳이 없거나 더 이상 잃거나 빼앗길 것이 없는 최악의 상황과 마주할 때 흔히 쓰는 말일 것이다. 살아가며 그런 날이 없으면 좋겠지만 피하고 싶다 해서 피해 가지 않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바닥은 마지막 배수진을 칠 수 있는 기회의 지점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바닥을 치고 오랫동안 힘들어했던 친구가 유럽 배낭여행을 간다고 했다. 권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가자고 했다. 스스로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며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던 나와, 바닥을 친 후 다시 올라오고 있는 친구가 어느 지점에서 서로 만난 것이다. 
 
스위스 인터라켄에 머물면서 하루 베른을 다녀오는 어느 간이역. 담배를 피우려 잠시 내렸다. 버릴 때 버리지 못하고 오르내릴 때를 분간 못하는 우리를 나무라기라도 하듯 열차는 우릴 두고 떠나버렸다. 조그만 손가방과 모자와 선글라스, 여행 기록 노트만을 실은 채로. 다음 날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인터라켄의 하늘을 날았다. 멀리 융프라우의 만년설을 보며 이미 잃어버린 것과 떠난 사람은 잊기로 했다. 
 
바닥은 모두 잃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한다는, 오르는 일만 남았다는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닥은 새로운 희망이다.
 
맨발로 걷다 보면 인간과 자연이 만나 서로 균형을 맞추는 일인 것 같다. 자연스레 허명(虛名)과 허욕(虛慾)이 조금씩 빠져나간다. 그래서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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