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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나주양민학살-동수동 보도연맹 사건Ⅲ대통령 특별조치령, '무죄 아니면 사형'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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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호] 승인 2007.06.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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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과 30일의 치안국통첩이 문제인데, 보도연맹원 학살지시와 같은 중대한 사항이 치안국장 손에서 나왔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재미동포 이도영이 미 국립문서보관서에서 찾아낸 문서이다. 이 문서를 작성한 주한미대사관 육국무관 에드워즈 중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에 대한 처형명령이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경기도 이천과 안성 등에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학살이 자행된 것은 7월 1일경이었다.

또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구덩이를 판 날자가 7월 2일경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 29일과 30일의 치안국통첩은 최고위층의 지시와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전 해군준장 남상휘의 증언도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그는 1950년 7월 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포항경비사령부에 좌익분좌를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하달되었던 바, 이 명령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에게 각각 내린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또 경찰의 명령은 조병옥 내무부장관이 김병완 치안국장을 통해 각 도경국장에게 하달되었다고 말하였다.

경찰의 명령을 조병옥이 내렸다고 말한 것은 경남북에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를 학살하였을 때, 주로 조병옥이 내무부장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집단학살은 주로 경찰이 맡았고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군이 주로 관계하였다.

남상휘의 증언이 정확하다면,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와 형무소 재소자 학살명령은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내린 것으로, 법무부장관 등 관계 장관이 묵인 또는 협조하였다.

따라서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이 포함된 자리에서 '결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안국 통첩 등은 이러한 결정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학살은 성격을 비교해 볼 때 전쟁이 일어난지 3일 후인 6월 28일 이 날짜와 관련해서는 뒤에서 분석할 것이다.

피난수도 대전에서 발동된 이승만 대통령의 비상사태핟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특별조치령은 또한 날짜와 성격면에서 6월 29일자, 6월 30일자 치안국통첩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이 대통령의 특별조치 제 3조는 살인, 방화, 강간, 군사, 교통, 통신, 수도, 전기와사, 과농서 기타 중요한 시설 및 그에 관한 중요 문서 또는 도서의 파괴 및 훼손, 다량의 군수품, 기타 중요물자의 강취, 갈취, 절취 등 약탈 및 불법처분, 형무소 유치장의 재감자를 탈주케 한 행위 등을 한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다른 조항도 너무 심하지만, 전쟁시에 자주 일어나는 일로서 무기나 15년 또는 5년, 3년도 아니고 일률적으로 사형에 처하게 한 것은 엄중처단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서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단독판사가 단심으로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병진 판사가 실제로 직면하였던 것처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어떤 혐의자는 사형에 처할수 있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하여야 했다. 실제로 수복 후에 있었던 수많은 부영자 처형에는 이 조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국회에서는 이 조항에 대하여 여러 차례 비판하였고, 급기야는 대통령 특별조치령의 폐지를 결의하기까지 하였다.

보도연명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집단학살 지시는 시점도 시점이지만, 바로 이와 같은 대통령 특별조치령의 제정 및 국회나 여론의 비판에도 그러한 법령을 완강히 집행하겠다는 권력수뇌의 정신상태와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전쟁 직후 집단학살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30만 명을 넘는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평택 이남의 보도연맹원 숫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30만명보다 약간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 44주년 특별기획으로 1994년에 방송된 청주기독교방송국 보도부의 <보도연맹을 기억하십니까?> 에서는 충북의 경우 보도연맹원 1만여 명 가운데 3천여 명이 7월에 집중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충북지방에서 보도연맹 등의 관계로 학살된 사람 중 알려진 사람들이 2천 명쯤 되는 것을 볼 때 3천여명 학살설은 설득력이 강하다. 그러나 경부의 경우 유족들이 피학살자 수가 3만여 명일 것이라고 추산한 것은 과다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학살에 대하여 가장 자세히 취재한 곳은 향도일보 이다. 그런데 문제는 향도일보 취재반이 조사한 곳이 다른 지역 보다 특별히 희생이 많은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커밍스의 면밀한 분석에 의하면 경남에서는 남해 한 곳만 인민위원회가 없었는데, 향토도일보 기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남해에서도 희생자가 꽤 있고, 여러 지표로 볼 때 의령, 함안, 하동은 해방 직후 가장 급진적인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취재에서 빠져있다.

또 양산처럼 희생자가 많았던 지역은 희생자수를 밝혀내지 못하였다. 어림짐작을 해보면,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로 학살된 사람들은 제주도에서의 학살과 비슷하게 3만 명을 상회할 것이나 최고 10만 명은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집단학살과 관련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이자 초법적인 집단학살이라는 만행에 대하여 항거한 경찰관도 있었다는 점이다.

충남 천안 경찰서장, 제주 성산포 경찰서장도 그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경에서 보도연맹원들을 군이 집단학살한 것은 경찰서장한테 하라고 지시했으나 서장이 못한다고 거부하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본 대로 사천, 삼천포 지역에서도 경찰서장이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를 학살하라는 지시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제책을 모색하였다.

일제시기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던 강석봉 등이 처형되지 않은 것도 광주 경찰 책임자의 배려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충북 괴산국 소수면에서는 지서장과 의용소방대장이 총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2백여 명을 살려주었다.

이 지역은 인민군 점령시에도, 국군에 의한 수복 전후의 시기에도 아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제주도의 경우 똑똑한 인재가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고 주민들은 증언하는데,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들의 상당수는 그 지역의 중간층으로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일제강점하에서 교육시설의 미비, 편파적 교육 등으로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무척 적었고, 그나마 피교육자의 일부는 친일파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일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일자리가 없어 허송세월하였고,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항일투쟁으로 희생되었다.
한국전쟁과 나주양민학살-동수동 보도연맹 사건Ⅱ
대통령 특별조치령, '무죄 아니면 사형'

6월 29일과 30일의 치안국통첩이 문제인데, 보도연맹원 학살지시와 같은 중대한 사항이 치안국장 손에서 나왔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재미동포 이도영이 미 국립문서보관서에서 찾아낸 문서이다. 이 문서를 작성한 주한미대사관 육국무관 에드워즈 중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에 대한 처형명령이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경기도 이천과 안성 등에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학살이 자행된 것은 7월 1일경이었다.

또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구덩이를 판 날자가 7월 2일경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 29일과 30일의 치안국통첩은 최고위층의 지시와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전 해군준장 남상휘의 증언도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그는 1950년 7월 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포항경비사령부에 좌익분좌를 처형하라는 명령서가 하달되었던 바, 이 명령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에게 각각 내린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또 경찰의 명령은 조병옥 내무부장관이 김병완 치안국장을 통해 각 도경국장에게 하달되었다고 말하였다.

경찰의 명령을 조병옥이 내렸다고 말한 것은 경남북에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를 학살하였을 때, 주로 조병옥이 내무부장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집단학살은 주로 경찰이 맡았고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군이 주로 관계하였다.

남상휘의 증언이 정확하다면,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와 형무소 재소자 학살명령은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내린 것으로, 법무부장관 등 관계 장관이 묵인 또는 협조하였다.

따라서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이 포함된 자리에서 '결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안국 통첩 등은 이러한 결정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학살은 성격을 비교해 볼 때 전쟁이 일어난지 3일 후인 6월 28일 이 날짜와 관련해서는 뒤에서 분석할 것이다.

피난수도 대전에서 발동된 이승만 대통령의 비상사태핟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특별조치령은 또한 날짜와 성격면에서 6월 29일자, 6월 30일자 치안국통첩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이 대통령의 특별조치 제 3조는 살인, 방화, 강간, 군사, 교통, 통신, 수도, 전기와사, 과농서 기타 중요한 시설 및 그에 관한 중요 문서 또는 도서의 파괴 및 훼손, 다량의 군수품, 기타 중요물자의 강취, 갈취, 절취 등 약탈 및 불법처분, 형무소 유치장의 재감자를 탈주케 한 행위 등을 한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다른 조항도 너무 심하지만, 전쟁시에 자주 일어나는 일로서 무기나 15년 또는 5년, 3년도 아니고 일률적으로 사형에 처하게 한 것은 엄중처단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서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단독판사가 단심으로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병진 판사가 실제로 직면하였던 것처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어떤 혐의자는 사형에 처할수 있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하여야 했다. 실제로 수복 후에 있었던 수많은 부영자 처형에는 이 조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국회에서는 이 조항에 대하여 여러 차례 비판하였고, 급기야는 대통령 특별조치령의 폐지를 결의하기까지 하였다.

보도연명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집단학살 지시는 시점도 시점이지만, 바로 이와 같은 대통령 특별조치령의 제정 및 국회나 여론의 비판에도 그러한 법령을 완강히 집행하겠다는 권력수뇌의 정신상태와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전쟁 직후 집단학살된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30만 명을 넘는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평택 이남의 보도연맹원 숫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30만명보다 약간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 44주년 특별기획으로 1994년에 방송된 청주기독교방송국 보도부의 <보도연맹을 기억하십니까?> 에서는 충북의 경우 보도연맹원 1만여 명 가운데 3천여 명이 7월에 집중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충북지방에서 보도연맹 등의 관계로 학살된 사람 중 알려진 사람들이 2천 명쯤 되는 것을 볼 때 3천여명 학살설은 설득력이 강하다. 그러나 경부의 경우 유족들이 피학살자 수가 3만여 명일 것이라고 추산한 것은 과다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학살에 대하여 가장 자세히 취재한 곳은 향도일보 이다. 그런데 문제는 향도일보 취재반이 조사한 곳이 다른 지역 보다 특별히 희생이 많은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커밍스의 면밀한 분석에 의하면 경남에서는 남해 한 곳만 인민위원회가 없었는데, 향토도일보 기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남해에서도 희생자가 꽤 있고, 여러 지표로 볼 때 의령, 함안, 하동은 해방 직후 가장 급진적인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취재에서 빠져있다.

또 양산처럼 희생자가 많았던 지역은 희생자수를 밝혀내지 못하였다. 어림짐작을 해보면,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로 학살된 사람들은 제주도에서의 학살과 비슷하게 3만 명을 상회할 것이나 최고 10만 명은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집단학살과 관련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이자 초법적인 집단학살이라는 만행에 대하여 항거한 경찰관도 있었다는 점이다.

충남 천안 경찰서장, 제주 성산포 경찰서장도 그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경에서 보도연맹원들을 군이 집단학살한 것은 경찰서장한테 하라고 지시했으나 서장이 못한다고 거부하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본 대로 사천, 삼천포 지역에서도 경찰서장이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를 학살하라는 지시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제책을 모색하였다.

일제시기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던 강석봉 등이 처형되지 않은 것도 광주 경찰 책임자의 배려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충북 괴산국 소수면에서는 지서장과 의용소방대장이 총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 2백여 명을 살려주었다.

이 지역은 인민군 점령시에도, 국군에 의한 수복 전후의 시기에도 아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제주도의 경우 똑똑한 인재가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고 주민들은 증언하는데, 보도연맹원 및 경찰감시 대상자들의 상당수는 그 지역의 중간층으로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일제강점하에서 교육시설의 미비, 편파적 교육 등으로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무척 적었고, 그나마 피교육자의 일부는 친일파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일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일자리가 없어 허송세월하였고,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항일투쟁으로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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