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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 객원기자 |
내가 기억하는 80년 5월 18일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좀 다르다. 다른 이들의 기억의 조각 속에 존재하던 그날은 내가 자라면서 알게 된 새롭고 충격적인 사실이었고, 어린 시절 기억하는 그날은 매우 달랐다.
여느 때처럼 학교는 즐거웠고, 친구들과 영산포 여기저기를 다니며 구경하고 뒹구는 것이 한참 재밌어지는 시기였다. 1학년, 2학년 때는 학교 다니는 것의 재미를 느꼈다면 3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 가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학년이 바뀌고 슬슬 학교생활이 무료해질 무렵 학교 휴교령이 내려졌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신나고 즐거운 날이었다. 5월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비도 내리지 않는 화창한 날씨는 10살 어린아이에게 돌아다니며 놀기 딱 좋은 날씨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이 무슨 횡재인가? 마치 뭔가를 거저 얻은 듯 영산포 여기저기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어린아이들의 노는 장소는 학교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학교 나오지 말고 쉬라고 한 날에도 내가 없는 학교는 잘 버티고 있는지 궁금해서 기어이 학교 근처를 지나며 한 번씩 보고 와야 안심이 되었다. 학교도 잘 버티고 있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한데 왜 학교를 오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영산포 소전(우시장-지금의 축협마트)을 지나 사철나무가 가지런히 정돈된 동네의원을 지난다. 동네의원을 지나면 학교 앞 가게 3개가 나란히 우리를 반기며 야트막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학교 정문 가게 건너에는 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그곳의 연못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동산으로 꾸며졌다.
쉬는 동안에도 매일 학교가 잘 있는지 궁금한 동네 친구들과 학교 주변을 배회했다. 학교 근처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지만, 그때는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날 이전이나 이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생소한 광경이었다. 버스 유리창이 깨지고 문이 열린 채 다니는 버스에 동네 삼촌들이 나무 막대기를 들고 뭐라고 하는 모습은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큰일이 벌어진 듯 생각되었다.
버스 밖에는 ‘김대중이 석방하라’라는 붉은 글씨가 걸려있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고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였다. 각목을 들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목청을 높여서 뭔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 장면을 목격하며 순간 무서운 생각에 움츠리며 피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깨진 버스 유리창 사이로 뭔가 들어있는 박스가 우리에게 던져졌다.
달려가서 보니 라면이 들어있었다. 버스 안에 있던 삼촌들은 우리에게 먹으라는 듯이 손짓하였다. 순간 우리가 위험하지 않다는 안도감에 라면을 하나둘씩 챙겼다. 그날 이후에도 라면과 다른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주며 거리를 돌아다니던 삼촌들은 5·18 민주 항쟁의 한 조각을 만들어 간 시민 열사들이었다. 광주에서 제법 떨어진 영산포도 그 난리의 소란을 겪었다.
며칠이 지나고 광주에서 직장을 다니던 큰 언니가 갑자기 집에 내려왔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을 친구랑 둘이 걸어서 내려왔다고 한다. 언니는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집에 도착한 이야기를 하였다. 가족들 모두 놀라고 언니가 살아서 집에 온 것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다.
광주에서 난리를 피해 집에 오던 도중 대촌에서 군인들에게 잡혀갈 뻔한 것을 동네 주민들이 구해 준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도로를 친구랑 둘이서 걷고 있는데 근처 산속에서 사람들이 얼른 오라고 손짓해서 그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몸을 숨겼다는데 잠시 후 군인들이 트럭에 사람들을 태우고 그 도로를 지나갔다고 한다. 좀만 늦었어도 친구와 함께 군인들에게 잡혀갔을 것이라며 놀란 맘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족히 10센티는 돼 보이는 웨지힐을 신고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광주의 진실을 모르던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놀기 좋던 그 푸르른 5월이 자라면서 마주한 잔인한 5·18이라서 더 서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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