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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용식 수필가 |
오랜 인연들을 만나다 보면 옛일을 소환할 때가 있다.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 보는 것이다. 종종 놀랍거나 씁쓸하거나 답답한 적이 있다. 어떤 일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달라서. 기억을 통째로 공유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겨우 한 조각을 들고서 그게 전부라 알고 있는 경우, 아예 뭉텅이로 있거나 없는 경우까지 기억은 참 다르다.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귤화위지(橘化爲枳)가 떠오른다. 강남에 있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함께 겪었던 일도 기억의 밭이 서로 다르니 그 열매도 다른 것인가.
상처일수록 기억의 다름은 더하다. 한쪽에는 가슴에 대못으로 남은 일을 다른 한쪽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경우다. 그런 일들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 처신, 내가 옳다는 확신에서 발화된다. 자신의 말이나 행위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최소한 의심의 기회조차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까운 선후배들과 점심을 했다. 이야기가 돌고 돌다 군대 이야기로 갔다. 나왔다 하면 금세 뜨거워지는 군대 시절 이야기들. 그런 자리면 내게도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휴일, 고참들을 따라 부대 앞 웅덩이로 고기 잡으러 갔다. 입대 4개월째 군기 충만한 졸병에게 물고기 잡이라니…. 군대에 이런 낭만도 있구나 싶어 설레고 신났다. 어릴 적에 형들을 따라 나주 들판의 숨겨진 웅덩이에서 즐겁게 물고기 잡던 시절이 떠올라 기대를 더했다.
물고기 잡을 때 가장 큰 재미는 손을 타고 전해지는 미끌미끌한 미꾸라지며 붕어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놓치면 다시 잡기도 하면서 그 스릴과 기쁨에 흠뻑 젖는 일이다. 그러나 그날 내 임무는 죽어라 웅덩이 물을 퍼내는 일뿐이었다. 고기 잡는 즐거움이 아니라 물을 퍼내는 고된 사역(使役)이었다.
논둑에 앉아 막걸리 파티를 즐기고 있던 고참들은 웅덩이 바닥을 보이자 “야, 수고했어. 막걸리 한잔하고 좀 쉬어"하며 마치 날 생각해주는 척하더니 저희들끼리 신나게 고기잡이 파티에 빠진 것이다.
그러다 다시 물이 고이면 고함을 쳤다. “야, 뭐해, 얼른 물 퍼!” 사역병에 불과했던 나는 다시 물을 퍼내고 논둑에 앉아 남은 막걸리를 바닥까지 긁듯이 다 마셨다. 취하여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돌아오는 논둑길에 일부러 넘어져 버렸다. 논바닥에 쏟아진 물고기를 급히 쓸어 담는 척했다. 그 순간 누군가 냅다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장군 멍군이었을까?
회식 자리에서도 설움은 열외가 아니었다. 막걸리 맛이 괜찮으면 겨우 한잔이었고 맛이 상한 막걸리는 당연한 듯 졸병인 내 차지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고참이 주는 잔을 거부할 수도 없어 꿀꺽꿀꺽 다 받아 마시니 그것도 술이라고 취기가 올랐다. 섭섭함과 분노 탓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내무반으로 들어가면서 자고 있던 고참들 머리를 일부러 더듬으며 지나갔다. 그 순간 곧바로 귀싸대기가 날아왔다. '쫄따구가 술 처먹고 군기가 빠져도 한참 빠졌다'는 고함과 함께. 욱신거리는 얼굴을 감싸고 밤을 앓았다. 남은 군 세월이 천리만리처럼 느껴졌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워지는 일도 있었다. 공병 야간 상황실에 근무하는 꿀 보직을 받았다. 덕분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생겼다. 다디단 그 시간에 나는 책을 읽거나 엽서에 시를 썼고, 시에 삽화를 입히면 그럴듯한 ‘시화 엽서’가 되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전우신문에 시를 투고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종종 내 시가 실린 전우신문이 배달되는 날이면 ROTC 출신 이 중위가 회식까지 시켜주었다.
그러다 나만의 놀이는 전우신문에서 당시 인기 잡지였던 ‘선데이 서울’로 옮겨갔다. 구로공단이나 양장점 등에서 근무하는 처녀들이 팬레터를 보내왔다. 주간지에 실린 시를 보고 그 풋풋한 여심들이 군인, 아니 그 시심(詩心)을 찾아 날아든 것이다. 나는 그 편지들을 동료 병사들에게 보여주며 소개를 미끼로 엽서 스무 장을 받아내기도 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쉬이 기억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고참이어서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다면 졸병과는 달리 고참에게는 평생 없는 일이 될 뿐이다. 시를 기웃거리며 그러길 좋아했던 내가 여기저기 시를 앞세워 놀이를 했던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고, 한동안 그게 부끄럽거나 잘못인 줄도 모르게 지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억은 서로 다르게 적힌다.’라는 이소라의 노랫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세월이 갈수록 더. 고참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가슴에 어떻게 적어놓고 있을까. 기억에 남아있기나 할까. 그들이 한 번쯤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것은 내가 그 시절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들녘 웅덩이 물은 진작 퍼냈지만, 여태껏 퍼내지 못한 내 마음 웅덩이의 씁쓸한 기억은 이제라도 퍼내려 한다. 쉰 막걸리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든 적도 있었지만, 취기도 분노도 이미 없는 것이니 그만 잊어야겠다. 다만, 시를 보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준 그때 그분들에게는 내내 사죄하고 싶다. 그러라고 남아있던 기억이 아닐까.
곧 4월이고 5월이다. 기억의 계절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