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 전쟁 영웅인 막시무스가 황제에게 자신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하자 황제는 막시무스에게 고향 집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한다. 막시무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집은 튜일로의 언덕에 있습니다. 햇살을 받으면 따스해지는 벽돌, 낮이면 정원에 허브향이 가득해요. 밤엔 재스민향, 길엔 커다란 포플러가 서 있고 무화과, 사과, 배나무도 있습니다. 흙은 아내의 머리처럼 검고요. 비탈에 올리브, 포도나무가 있고 아들이 조랑말과 뛰어논답니다.” 

 

듣거나 읽게 되면 그림이 그려지고 마음이 움직여지는 게 문학이요 시라면 그 문학과 시는 곳곳에 있는 게 아닐까. 한때 시인 아닌 사람 없다가 아니라 알고 보면 평생 시인 아닌 사람이 없다. 시심(詩心)과 시정(詩情)을 품고 사는 사람 또한 분명 시인인 까닭이다. 

 

세상에 잔잔한 감동을 선물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 ‘시바타 도요’의 시 <비밀>이다. 

 

‘나 말이야,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의 격려를 받아/ 지금은/ 우는소리는 하지 않아// 98세라도 사랑은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고 싶은걸.’

 

어느 지자체가 운영하는 어머니 한글학교에서 뒤늦게 한글을 배운 박영수 어머니가 지은 시 <예쁜 꽃>이다.

 

‘우리집 들어오는 대문에는 장미꽃이 너무나 예쁘게 피었다/ 우리집 화단에도 예쁜 꽃들이 많이 피었다/ 나도 꽃처럼 예쁜 때가 있었다.’ 두 분 다 인생 황혼기에 쓴 시다. 평생 마음에 담긴 시심을 뒤늦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AI가 이제 시까지 넘본다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애지중지할 만큼 값나는 것도 아닌데 소장품으로 간직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가령 낡고 오래된 손목시계나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어떤 그림 같은 것들이다. 그 손목시계가 아버지의 유품이라면, 그 그림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그린 그림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시가 그렇다. 시가 의미 있고 그토록 감동을 주는 까닭은 사람이 지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가 체포되었을 때 그의 배낭 속에는 네루다, 바예호 등 69편의 시가 필사된 녹색 노트가 발견되었다. 계산기가 셈을 단숨에 계산하여 숫자로 제시하는 것처럼 AI가 금세 시 한 편을 써낸다면 과연 그게 기계의 연산 작용과 무엇이 다를까. 

 

작년 8월, AI 시인 시아가 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호기심에 사서 읽었다. 시아는 ‘시작(詩作)하는 아이(AI)’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시아는 인터넷 기사와 백과사전으로 한국어를 학습하고 한국의 근현대 시 12,000여 편의 정보를 바탕으로 시를 만들었다. 원하는 주제어를 입력하면 30초 만에 시 한 편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AI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시를 쓰는 이유>를 옮겨본다. 이 시를 읽은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시를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냥 쓰는 것입니다./ 쓸 수밖에 없기에 씁니다.//

무엇을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줄일 수 있는 말이 아직도 많이 있을 때/ 그때 씁니다.//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하나의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의 말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덜어내고 덜어내서/ 최후에 남는 말이/ 시입니다.// 바람에 띄운 무당벌레의/ 날갯짓입니다.// 더 가볍게/ 이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말을/ 부르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길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혓바닥 위에서/ 아직도 더 할 말이 있을 때/ 그때 씁니다.//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가끔 시를 쓴다. 쉽게 쓰이는 시는 없다. 시를 쓰면서 대상과 존재를 새롭게 만나고 깨닫는 기쁨이 적지 않다.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과정에는 무엇엔가 눈길을 주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 내 안에 내가 너무 가득 차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를 비워야 비로소 존재가 그 빈 터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AI가 그런 과정을 거쳐 시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이미 입력된 가득 찬 정보를 활용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는 작가의 눈물이고 기쁨이고 발견이고 통찰이며 깨달음이다. 그걸 만나는 것이 시를 읽는 일이다. 그러니 시를 기웃거리는 AI는 달래고 설득하여 돌려보낼 일이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까닭이다. 귀를 기울여보시라. 주변에 시는 많다. 생선 장수도 막시무스도 황혼기에 그 아름다운 마음을 토해낸 분들도 모두 시인이다. AI, 감히 어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