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섹스였다고 부정하고 왜곡하지 마라, 그 모든 게 강간이다”

2010년 말 위키리크스의 창립자인 줄리언 어산지가 두 스웨덴 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 한 여성은 콘돔 없는 섹스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어산지가 힘을 사용해 콘돔 없이 삽입하려다 실패했다고 진술했다. 또 다른 여성은 자신이 잠든 사이 어산지가 콘돔 없이 삽입했다고 진술했다. 어산지는 "나는 일종의 남성 우월주의자일지는 몰라도 강간범은 아니다. (…) 그 여성들은 각각 나와 섹스를 원했으며 끝난 뒤에도 기꺼이 나와 시간을 보냈다"고 반박했다.

섹스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콘돔 없이 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 때, 그것은 강간일까. 강간, 가정폭력 등 여성대상 범죄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 조디 래피얼이 쓴 책 《강간은 강간이다》는 이런 사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즉 '강간은 강간이다'. 강간은 '나쁜 섹스가 아니고, 남녀 간의 '오해'에 따른 불운한 사건도 아니다'라는 얘기다. 

강간에 대한 종래의 이미지는 이렇다. 마스크를 쓴 채 흉기를 들고 숲에 숨어 있던 남성이 지나가던 여성을 물리력으로 제압해 성폭행 하는 것. 그러므로 이런 이미지에 포함되지 않는 남녀 간 성행위는 강간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술자리에 참석한 새내기 여학생이 선배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두 번째 데이트에서 가벼운 키스 정도를 생각한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삽입성교를 강요당했거나, 돈이 궁한 것으로 알려진 호텔 메이드가 최고위층 권력자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을 때, 이것은 강간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은 당연히 강간이다.

저자의 '강간은 강간이다'는 강간을 강간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사회, 문화적 요소들을 과학적 통계를 통해 들춰낸 책이다. 미국에서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강간에 대한 논쟁은, 강간을 가장 좁은 의미로 축소시키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더 넓은 범위로 확대하려는 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피해자의 책임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강간 부정론자들이 강간을 단순히 '나쁜 섹스'의 범주로 편입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피해자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왜 늦은 시간에 외출했는가, 뭘 믿고 술을 그렇게 마셨는가, 왜 그 남자를 따라갔는가, 왜 '최선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는가, 무슨 저의로 이제 와서 고발하는가. 질문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강간은 없다'라는 것이다.

강간 부정론자들 중에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싶어 하는 남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적 해방을 페미니즘의 최우선 순위로 꼽는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여성이 ‘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강간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의적이지 않은 성관계, 그 와중에서 일어나는 언쟁, 압박, 유도, 이런 "사소한 일"까지 본격적인 성폭행으로 규정하는 것은 여성의 성적 자유에 해는 끼친다는 소리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진실은 많은 경우 강간이 잔혹한 범죄자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강간 문화에서, 여러 사람의 공조 속에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문화에서는 어떤 이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끔찍한 강간 범죄가, 다른 이에게는 단지 '유쾌하지 않은 하룻밤' 내지는 '사랑싸움'에 불과할 뿐인 상황이 가능한 것이다.

《강간은 강간이다》는 강간 범죄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물리력이나 권력을 이용해서 여성의 신체를 착취해 왔으면서도 사회적 지탄을 받기 전까지 그게 잘못인지조차 몰랐다고 말하는 강간범들, 심지어 합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대척점에서 젠더 권력,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강간 범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묵인하며, 가해자를 단죄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여성에게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드는 우리의 인식과 제도에 관해 꼬집는다. 한 피해자는 "섹스는 섹스고, 강간은 강간이에요. 둘을 비교하는 건 삶과 죽음을 을 비교하는 것과 같죠"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강간은 강간이다. 그것은 남녀 간의 커뮤니케이션 불일치도, 여자의 순간적인 변심도 아닌, 분명한 범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