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시의원 김노금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정엄마라는 말이 귀에, 눈에, 가슴에 쏙쏙 박혀 들어온다. 특히나 명절을 앞두거나 지금처럼 명절을 보낸 뒤끝의 한 달 이쪽저쪽은 엄마를 생각 할 때 마다 아픔 그 자체이다. 단 한 번도 효도다운 효도나 두둑이 용돈 한번 쥐어드리지 못했다는 자책이 더 해진 이런 증상은 앞으로도 그 아픔의 깊이가 더 해질 것 같다.     

이미 결혼시킨 딸이 둘이나 되고 덕분에 손주가 다섯이나 되어서 나 역시 두 딸아이의 친정엄마이다. 그러나 나의 의식 속의 친정엄마는 내가 아닌 나의 엄마, 그러니까 지금 여든 다섯의 나이를 바라보며 아파트에 홀로 계신 나의 친정엄마를 지칭하는 고유한 명칭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오남매를 길러내셨지만 아직 어느 자식 누구의 도움이나 봉양도 받지 못하고 홀로 사시는, 엄밀히 말하자면 독거노인인 셈이다. 사실 그동안 독거노인이라는 말을 대할 때면 빈곤함, 외로움, 쓸쓸함, 자식들의 부양을 전혀 받지 못하는 그런 어르신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가 어떤 도움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나의 엄마는 그 대상에 넣어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직도 단정히 앉아 돋보기를 쓰고 성경에 붉은 줄을 그어가며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시는 분이다. 어디서고 당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평생토록 기쁨으로 남을 섬겨 오셨던 엄마였다. 거기에다가 오남매 김장 김치며 맛있는 먹거리를 손수 마련하고 담가서 나눠주는 엄마를 단 한 번도 노인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은 부끄럽지만 속아지가 그리 깊지 못한 딸년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장부처럼 씩씩하게 가정의 대소사를 진두지휘하며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엄마의 강인한 모습이 우리들 의식 속에 너무 강하게 자리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우리들의 아버지... 양반 가문이라는 성씨를 훈장처럼 목에다 걸고 평생을 가정경제나 자녀교육은 모두 아내인 엄마에게 짐 지우셨던 아버지는 대책 없이 사람만 좋은데다 한량기질에 무골호인이셨다.

경제관념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만 좋던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온 동네 사람을 모아 걸판진 한판을 벌이길 즐겨 하셨다. 엄마는 단 한마디의 싫다는 내색 없이 그 수발을 묵묵히 들어드렸고 우리들 오남매는 말없이 일만하는 엄마보다는 호탕하고 유쾌한 아버지, 인물까지 좋고 입담까지 좋은, 거기에다 매너까지 너무나 신사적인 아버지가 정말 좋았다.

그런데 그 꼿꼿하고 자존심 강한 엄마가 변한 것을 올해 오남매가 동시에 느낀 것이다. 자식들이 변변찮음을 아신 것인지 얄팍한 용돈을 내밀 때면 "냅둬라"며 손을 휘저으시고 맛있는 식당에라도 모시고 갈 때면 어느새 식사비를 먼저 지불해 놓으시던 엄마, 그 엄마가 올해 제주도 여행에서는 뭐든 "응, 응, 좋을대로 해라"셨고 며칠 전에는 사위가 드린 용돈도 덥석 받아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고 다들 엄마가 늙으셨음을 공감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엄마는 그렇게  체면 없는 분이 결코 아니셨다. 그런데 그토록 당당하고 있어보이던 우리 엄마의 주머니가 가난 할 수도 잇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왜 이토록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엄마의 본 모습을 깨달아 알게 되었을까? 팔십 다섯이 다되도록 그야말로 삭신이 다 닳아 뭉개지도록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다가 폭삭 늙어버린 엄마를 이제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을까? 이런 마음에 애달파 하면서도 선뜻 엄마의 외로움과 가난함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아니 그럴 의지가 별로 없는 자식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며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함께 느낀다. 부모는 열 자식을 다 거두지만 자식은 한분의 부모를 결코 거두지 못하는 세태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많이 부끄럽고 아프다. 올해는 언론 매체에서 부모 모시는 문제로 살인과 자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뉴스에서 그 소식을 접한 순간 문득 홀로 계실 친정 엄마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평소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엄마에게 딱히 드릴말씀이 생각나지가 않아 "엄마! 팥죽 먹으러 갈까?" 했더니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자.. 그러자 어디냐? 내려가리?" 평소 같으면 이리 빼고 저리 빼며 어떻게든 집안으로 딸자식을 유인 했을 엄마였다. 뜨끈한 팥죽을 앞에 놓고 물었다. "엄마! 엄마 나랑 같이 살까?"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씩 웃었다. 생각만 해도 두고두고 너무 가슴 저린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