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행 배를 기다 린지 어느새 보름이 지나자 제풀에 겨워 공연히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일행은 지친 나머지 할 일 없이 행여나 배가 올까 바다만 바라본다. 그때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물럿거라."
"비켜라. 신임목사 행차시다."

제주 목사로 새롭게 부임하는 허희(許熙)가 도착한 것이다. 당시에 전라도의 목사는 나주, 광주(光州), 제주까지 3명이 외관직으로 근무할 때이며 각 지역 수령의 임무를 갖는 정3품의 벼슬이다.

제주목사를 본 최부는 그간의 불순한 날씨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하고 순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신임 제주목사와 최부일행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제주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이 다음날은 날씨도 맑고 배가 항구로 들어왔다. 전라도 수영(水營)과 병마절도사소속의 판옥선(板屋船)이다.

당시에 절도사는 관두량에서 가까운 강진의 병영에 있었고 그곳에서 수군의 배까지 관할하고 있을 즈음이라 신임제주목사 허희와 최부의 경차관 부임길을 위해 특별히 제주로 가기 위해 왔던 것이다.

판옥선은 배 위에 마루를 깔고 생활하기에 편리하게 만든 배였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서 싸움터에 나갈 때는 배 위에 뚜껑을 덮고 거북선처럼 지붕을 씌워 순식간에 모양을 바꾸는 배를 일컫는다.

대신 판옥선은 큰 바다의 먼 길을 주로 항해하기 때문에 배의 밑바닥이 날카로워 속도가 빠르고 생김새가 날렵하게 보이는 당시로서는 최신식 하이테크한 배를 말한다.

배에 오른 최부는 선실로 제주목사를 찾아갔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때에 갈 수 있게 되었군요. 사실은 제주에 갈 배가 없어서 근 보름 가까이 해진성관에서 허깨비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이제야 떠나게 되어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추쇄경차관이 여기에 계실 것이라며 빨리 가라는 전라도 관찰사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지요. 그분한테 감사 드려야지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판옥선은 깨끗하고 배가 안정감이 들었다. 제일 위층의 선장실은 삼층집 높이로 배 안에 서면 바다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이였으며 목사도 만족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선장에게 다가선 최부가 물어보았다.

"언제 제주에 도착합니까?"
"이 배는 오늘밤 추자도에서 밤을 새운 후 내일 오후 늦게 제주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1487년 11월11일) 관두량을 출발할 때는 초공들이 부지런히 배질을 해댔다. 배의 양쪽에 3개의 노에 2사람씩 6사람이 짝을 지어 힘을 합하고 모두 열두 사람이 노를 젓는 것이다.

하나의 노에 매달린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이 맞아야 긴 시간 노질을 계속할 수 있다.노 꾼들은 눈짓만 보아도 서로 통했다. 힘든 줄 모르고 끈기 있게 노를 젓는다. 한참이 지나자 배는 좁은 관두량 앞 바다를 벗어나고 있었다.

보름만에 제주로

가끔 힘에 지친 사공이 생기면 4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얼른 교대를 해주곤 해서 빠른 속도로 연안의 섬 사이를 지나 남해의 넓은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방이 터진 수평선이 배를 감싸듯 보일 무렵이었다. 선장의 나팔소리가 크게 울렸다.

"부-웅 부-웅."

그러자 빠른 동작으로 노를 걷어올린 선원들은 선장실이 있는 판옥의 뒤쪽으로 달려나갔다. 소나무 판자로 덮은 판옥선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발자국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러나 선원들은 숙달된 군인들처럼 소리 없이 움직인다. 엉덩이를 살짝 들고 깨금발로 걷는 것이 습관화되어있기 때문이다.그들은 닻을 일으켜 세웠다. 4사람이 하나의 닻을 세우는데 미리 역할을 정해 두어선 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하얀 돛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배의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자 배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좋아 오늘 오후면 추자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예, 모두가 나라님의 은덕입니다."
 
최부의 맞장구에 선장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판옥선은 옛날부터 사용해 오던 한선(韓船)을 자연환경과 지리적 여건에 맞게 개량한 배로 상당한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만든 배이다.

그래서 유사시에는 전쟁터에 투입하도록 되어있는 배가 판옥선이었던 것이다.
한
선은 좁은 강이나 섬 사이의 연안을 주로 다니기 때문에 배의 밑바닥이 평평해서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평저선 구조가 바로 한선의 기본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신임 제주목사와 최부 일행이 탄 배는 최근에야 판옥선으로 개조한 배였다.

이전까지는 조운선(漕運船)으로 이용되던 배를 소나무판자로 단단하게 판을 깔고 아래쪽 선실과 노를 젓는 사람들이 앉아있을 자리를 덮어 새로운 판옥선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조선에서 조운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제도로서 지방에서 걷어 들인 현물세금을 운반하던 것으로 다량의 운송에는 배를 이용해야만 했다.

초마선(哨馬船)이라고도 불렀던 조운선은 한선의 구조와 같았다. 단지 최상층의 선장실만 보통의 집처럼 만들어 배 전채를 관장하게 한 배를 일컫는다.

배가 큰 바다로 나갈수록 속도를 받기 시작했다. 파란 바다색이 하얗게 보인다. 아래층 선실에서는 때아닌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흔들거리자 멀미를 시작한 김중과 손효자가 배를 움켜잡고 뒹군다. 하얗게 변한 얼굴이 무서움에 질린 채 어쩔 줄을 모른다.

선실 벽에 기대고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도 음식물을 토한 찌꺼기가 얼굴의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배를 타본 적이 없는 초보 승선 자들은 배 멀미로 초죽음지경이다.

마루바닥에는 토한 음식물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최부는 아무도 몰래 살짝 선실을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