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큰 사람들’의 그 저돌적인 용기와 낭만을 기리며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언론인으로서 20년, 정치인으로 20년 가까이를 살아온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털어놓는 '걸물 열전(列傳)'이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정치 인류학이다. 책의 첫 장은 이승만에서 노무현까지 역대 대통령 8인을, 마지막 13장에는 유진산에서 이회창까지 대권에 근접했거나 2인자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그 중간에는 저자가 교유했던 인물 11명에 대한 작은 평전을 넣었다.

저자의 기억력이 비상하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넘쳐나는데 마치 현장을 스케치하듯 세세하게 글로 옮겼다. 저자와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맹물 같은 존재였다는 것. 노 전 대통령의 신중함 때문에 친해질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내가 관계된 국방위 회식사건 후 그의 후배 하나가 불리한 처분을 받아서인지 언젠가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 맞아볼래?' (중략)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후보 내락을 받고 베푼 회식자리에서 곽정출 의원이 앙앙불락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는 술잔을 곽 의원에게 집어던졌다."

소설가 이병주가 네집 살림을 했다는 증언과 선우 휘 조선일보 전 주필이 속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크게 저항했다는 얘기 등도 소개하고 있다. 전옥숙 여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저자는 스스로 '한국 사교계의 여왕봉'으로 명명한 전옥숙 여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루 살로메가 니체, 릴케, 프로이트에게 섬광 같은 자극을 주는 뮤즈가 되었다. (중략) 내가 아는 한정된 범위에서는 전 여사가 그럴듯하게 부각된다. 그 주변에는 김지하 시인, 이병주 소설가, 가수 조용필, 민주화 운동의 대부 장일순 등이 맴돈다. 열거하자면 각계각층 부지기수다."

또한 1958년 진보당 사건 때 일본으로 망명, 일본어 일간지 '통일일보'를 발행한 이영근 씨에 대해 정치에 대한 실사구시적, 현실주의적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조봉암이 진보를 한다면서 자립경제, 평화통일, 균등사회라는 실질적 목표를 지향하면 됐지, 굳이 사회민주주의라는 레테르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영근 발행인의 주장도 전하고 있다.

남재희는 폭넓은 독서와 여러 인물들과 맺은 친교, 수많은 술자리를 통해 인간과 역사를 아우르는 안목을 얻었다고 한다. 1958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한 이후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논설위원, 그리고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필자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취재하고 교유했다. 이후 4선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탐구를 그치지 않았다. 그 인간애를 바탕으로 필자는 자신이 교유했던 '한국 현대사의 가장 걸출한 인물'들의 인간적 풍모, 삶의 뒤 안, 고비 때마다의 마음의 풍경, 당시 역사의 흐름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필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역사학자도, 언론인도, 정치인도 경험할 수 없었던 현대사의 이면을 그려낸 인간 드라마다.

필자는 서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용기와 낭만을 기리며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힌다. "앞선 세대는 다음 세대를 흡족하지 않게 여긴다. 어쩐지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후배 세대를 통이 작다고 여긴다. 너무 가볍게 합리적으로 따진다. 저돌적인 용기가 부족하다. … 신문기자 20년, 정치생활 20년 가까이하며 내가 가깝게 사귀었던 인물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걸물들은 꿈도 있고 술도 잘하고 여성들과 잘 사귀었으며 통도 매우 컸다. 한마디로 간덩이가 컸다고 표현해야 실감이 난다.…

마지막 원고를 넘기고 나니 가까웠던 사람들과 술을 마셔가며 산 세월이 매우 소중했던 것으로 회상되며, 그 서술을 통해 20세기 후반부 우리 정치·사회의 풍속도를 나름대로 그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말하자면 한국 현대사를 옆에서 본 것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