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통한 사랑의 완성 그려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이 신작 장편 소설 《당신-꽃잎보다 붉던》을 펴냈다. 42년 전 문단에 데뷔한 작가의 마흔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책은 순애보다, 5년 전 소설 <은교>로 노년의 꺼지지 않는 욕망을 조명했던 작가는 이번엔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사랑의 채무와 청산, 완성을 이야기 했다.

지난해 2월부터 7월까지 문학동네 네이버카페에 '꽃잎보다 붉던 당신', 먼 시간 속 풍경들‘이란 제목으로 일일 연재되기도 했던 이 소설은,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한평생의 삶과 사랑과 관계에 대해, 또 그 현상의 이면에 대해 남김없이 천착해 펼쳐 보인다.

이 책은 2015년, 일흔 여덟 살의 윤희옥이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을 집 마당에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오랫동안 남편의 죽음을 준비해온 것처럼 부인 윤희옥의 뒤처리는 깔끔하다. 그런데 윤희옥은 경찰서를 찾아 남편의 실종신고를 한다. 그녀는 왜 사망신고 아닌 실종신고를 했을까?

한평생을 부인 윤희옥과 딸 인혜에게 헌신하며 살아온 듬직한 남편이자 아버지 주호백. 그는 2009년 두 차례 뇌출혈을 겪으면서 그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생의 말년을 맞이하게 된다. 치매로 주호백의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 흐름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로서는 결코 밝히고 싶지 않았을 한평생의 인내, 헌신, 사랑의 이면을 부인에게 또 딸아이에게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윤희옥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김가인한테 낳은 인혜를 제 딸처럼 헌신적으로 키웠으며, 심지어는 가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이 낳은 딸을 내팽개친 채 가인을 찾아갔을 때도 흔들림 없이 아비와 어미의 구실을 충실히 겸했던 그였다.

호백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희옥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그는 나의 충직한 시종으로 전 생애를 살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고 밝힌 대로 호백은 희옥에게 남편이 아닌 시종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일방적 관계에 변화를 초래한 것이 호백의 치매였다. 호백의 치매는 우선 헌신과 인내와 관용아래 눌려놓았던 호백의 상처와 분노, 슬픔을 밖으로 끄집어낸다. 부인이었지만 평생 희옥을 모시며 조심스러워했던 호백은 치매 이후 희옥에게 욕설과 막말은 다반사고 수시로 심통을 부린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변화는 치매 초기 잠깐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가 눈물을 떨어뜨리며 한 이런 말에서부터 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러니까 나를 … 좀 도와주세요…”.

희옥은 바로 그 순간 “처음으로 그에 대한 사랑의 불꽃같은 발화를 보고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로부터 4년 남짓, 호백의 죽음을 맞기까지, 희옥은 평생 비대칭이었던 둘의 사랑에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고자 안간힘을 쏟는다. 그렇게 호백에 대한 회한을 동반하고 늦게 찾아온 사랑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제목으로 쓰인 ‘당신’이다.

희옥은 호백이 자신만의 정원이라 불렀던 다락방에서 몰래 써 두었던 일기에서 이 말을 발견하고서 이렇게 곱씹는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라고.

소설의 첫머리는 43년 함께한 아내를 위한 헌사다. 저자는 “곁에서 항상 내 곁을 지켰지만 그 곁을 제대로 바라본 기억도 안 나는 아내, 그 말고도 어린 자식들에게, 언짢게 해서 헤어진 제자들에게 보내는 말이기도 하다. 과오가 많았던 내 사랑에 대한 회한, 성찰이 컸다 아내와 나의 불공평함을 조금이라고 갚고 싶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