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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사 이야기23 - 국문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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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호] 승인 2006.04.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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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몸소 나와 나주목사 국문

 광해군 즉위년에 벼슬이 대사성(大司成)까지 오른 박동열은 나주목사로 자진해서 내려온 인물이다.

1609년 정인홍이 이황을 문묘로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한 유생들이 정인홍1)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광해군의 오른팔이었던 정인홍을 유생들이 유생 명부에서 지어버리자, 광해군은 이들을 투옥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대사성 박동열은 유생들의 투옥을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진해 나주목사로 내려갔다. 박동열이 봉사(封事)를 올리려고 하던 중 예조 참의로 체직되자, 조정에 있는 것이 싫어 자청해서 나주목사로 내려 온 것이다.

신흠(申欽)의 상촌 선생집 제28권 신도비명(神道碑銘) 11수에 '박동열이 나주목사로 되었다라'고 기록한 뒤 당시 나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나주는 호남의 제일가는 도회지로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난 곳인데, 고을의 사대부들이 각기 당을 세워 서로 배척함으로써 유감과 원한이 쌓여 원수 간으로 변해 그대로 수십 년이 되었으나 관가에서 제어하지 못하였다"
  
 호남의 제일가는 도시지만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소문이 난 곳이 나주라는 얘기다. 여기에 사대부들이 각기 당을 세워 수십 년째 원수 간으로 지내고 있지만 관아에서 이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17세기 초 나주 지역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다스리기 어려운 나주에 내려온 박동열은 부임하자마자 고을의 장로(長老)를 부러 한 자리에 모아 놓고 타이르면서 우선 규율을 세웠다. 다음으로 준수한 선비를 뽑아 교화시키고 다듬어 인재를 만들고 글을 가르쳤다. 그 후 토호(土豪)가 잠잠해져 수십 년간 원수로 지내던 사대부들이 화해를 하게 되었다. 

"백년 이래로 이처럼 휼륭한 수령은 없었다"

 박동열은 이미 5년 전 황주목사로 나가 부역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어사(御使) 추천으로 선조로부터 옷감을 하사받기도 했다. 황주 백성들이 "백년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수령은 없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후 박동열은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지낸 뒤 1606년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까지 이르렀다. 형조참의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그가 한 직급 낮은 나주목사로, 그것도 내직에서 외직으로 스스로 내려오겠다고 자진한 것을 볼 때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4년 뒤인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도 이를 적극 반대하다 그의 동생인 박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을 앓아 풀려났었다.

1613년 4월 25일 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살해사건'이 발생하였고 대북파의 이이첨은 범인 박응서에게 영창대군 추대음모를 허위 자복하도록 교사(敎唆)하였다. 이에 박응서는 광해군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역모를 계획하였다"라고 허위진술을 하여 옥사가 시작되었다.

5월 6일 김제남이 삭탈관직 되었지만, 대북파는 역모사건을 더욱 확산시켜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달라는 유명(遺命)을 받은 7명의 고명대신(顧命大臣)까지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5월 16일 고명대신 중에 한 명이며, 의인왕후(선조의 첫 왕비 박씨)의 조카인 박동량이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소문에 불과하였던 유릉(裕陵)에 대한 저주(咀呪)를 발설하였다. 그리고 저주행위의 중핵인물로 김제남과 인목대비를 지목하였다.  

광해군도 정치적 의도에 따라 사건해명을 위해서 직접 진두지휘하였으며, 저주와 관련하여 김제남·인목대비·영창대군·정명공주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인물들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그 결과 저주와 관련된 많은 무당이 문초를 받게 되는 이른바 '무녀지옥'(巫女之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강화에 유배됐으며, 김제남은 사사(賜死),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한편 김응벽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주목사 박동열이도 연관되어 있다고 발설한다.

중풍 걸려 광해군 국문 중단
 
 6월29일 광해군은 몸소 나와 박동열을 국문하였다.

나주에서 갑자기 끌려 온 박동열은 광해군에게 "선 왕비의 외가붙이로 집안 대대로 근신하여 지켜왔으며, 성격상 사람들과 사귀며 놀지 않았는데, 이는 온 조정의 사람들이 아는 바입니다"라며 "김제남과 같이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그저 친분만 있을 뿐 절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김응벽을 처음에 나주에 가두어 두었을 때 그가 술을 달라고 하였으나 주지 않았고, 그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필시 이로 인해 혐의를 샀을 것입니다"라고 혐의 사실을 부인하였다. 이미 김응벽의 진술이 거짓임이 드러난 뒤라 이날 박동열은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국문을 끝마치기도 전에 얼굴색이 변하고 말문이 막혔다.

박동열을 붙잡아 왔을 때 중풍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광해군은 국문을 중단시키고 박동열을 치료하라고 명한 뒤 방면하도록 지시했다. 이날 들것에 실려 나간 박동열은 고향으로 내려가 중풍을 앓다 10년 뒤 숨졌다.

그의 아들 장남 호(濠)는 그 뒤 남평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반남이 본관인 박동열은 다섯 살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시문(詩文)에 능했고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그리고 국조의 고사에 두루 능통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는 '봉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記言別集, 봉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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