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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사이야기36-김성일2사직단 위판 불에 타 사직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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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호] 승인 2006.09.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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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6년 사직단(社稷壇) 위판이 불에 타 그 책임을 지고 김성일은 나주목사직에서 사직하였다. 선조 19년. 1586년 11월 12일(임인).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기를,

“나주(羅州) 사직단(社稷壇)의 위판(位版)이 밤중에 모두 타버렸습니다.”
“목사 김성일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推考)하라.”

나주 사직단의 위판이 불탄 뒤에 김성일은 하루라도 신주(神主)가 없어서는 안 된다면서 곧바로 위판을 만들어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그냥 놔두지 않았다.

“조정에 아뢰지도 않고서 수토(守土)하는 신하가 지레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신(神)을 섬기는 예(禮)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목사와 감사 한준(韓準)을 추고하고, 신주를 고쳐 만드소서.”

사직단 위판을 곧바로 만들었지만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당파에 휩쓸려 파직되고 만다.
 1589년 11월 21일. 선조는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을 일본 통신사(通信使)의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로,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差出)하였다.

1년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된 김성일은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는 상반된 견해를 내놓았다.

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 중에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 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抗倭戰)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퇴계의 양대 제자 김성일·유성룡

 김성일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물었다.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정언 정이주는 "요순과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아부를 하였다. 그러나 김성일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김성일의 말에 선조의 얼굴빛이 바뀌자 경연에 있던 대신들이 벌벌 떨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는 시점에서 유성룡이 나서 김성일을 변호하였다.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제야 선조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세 술을 돌렸다.
 퇴계의 양대 제자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이 꼽힌다. 안동 일대의 명문가는 퇴계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지만, 퇴계 다음으로는 서애·학봉과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  

양대 제자는 개성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서애가 복잡한 현실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데 주력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면, 학봉은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가 바로 경세와 의리인데, 서애와 학봉이 각각 이를 담당했던 셈이다. 

 학봉집안과 서애집안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택으로도 유명하다. 학봉집안의 고택으로는 학봉의 아버지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川前)의 대종택과 학봉 자신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한집안에 명성을 떨치는 종택이 두 채나 있는 셈이다.

서애집안도 그렇다.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양진당(養眞堂)과 서애 본인의 집이었던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충효당이 있는 하회마을은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전국적으로 더 알려졌다.  

김성일은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 家禮》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 杜氏通典》·《구씨의절 丘氏儀節》·《향교예집 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 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왜구는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김성일이 죽은 뒤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김성일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강개하여 대절(大節)이 있었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과감한 말로 직간(直諫)하였다. 기축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을 때에는 정직하게 몸가짐을 하여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왜인의 서계(書契)에 패만(悖慢)한 말이 많자 엄격한 말로 꾸짖어 물리치고 받지 않으니, 왜적의 괴수도 모두 두려워했고, 따라서 서계의 내용도 고쳤다. 그가 귀국해서 옥당(玉堂)의 장관이 되어서는 자주 소차(疏箚)를 올려서 당시의 병폐를 절실하게 지적하였다.

권신(權臣) 정철(鄭澈)이 기축역옥(己丑逆獄)으로 인하여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을 터무니없는 죄로 얽어 죽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최영경의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김성일이 어전에서 항언(抗言)을 하면서 이를 명백하게 따져 설원하고 복관(復官)시키니, 청론(淸論)의 한 맥이 이를 힘입어 이어졌다.

임진년 봄에 영남의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남쪽 변방으로 달려갔는데, 왜적들이 이미 쳐들어와 열군(列郡)이 와해되어 풍문만 듣고도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그런데도 김성일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보수(保守)할 계획을 하였다. 왜적들이 웅천(熊川)에 쳐들어왔을 때 그는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버티고 앉아 비장(裨將)을 독촉해서 싸우게 하여 왜적의 선봉장을 베니, 왜적이 이 때문에 조금 물러가게 되었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김성일이 '왜구는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큰소리 쳐서 방비를 해이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잡아다가 국문하도록 명이 내려져 있었는데, 특별히 이를 용서하고 곧바로 초유사(招諭使)로 임명하였다. 김성일은 도로 영남 지방으로 들어가서 동지를 불러모으고 의병을 규합하니, 원근에서 모두 메아리처럼 호응하였으므로, 함락되었다가 도로 우리의 차지가 된 고을이 16, 7개나 되었다.

김성일이 지은 초유하는 격문(檄文)은 충의가 북받치고 말뜻이 격렬하였으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들조차도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가 마음이 동해서 눈물을 떨구었다. 우도 순찰사로 승진 제수되었다가 계사년 여름에 병으로 인해 군막(軍幕)에서 죽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들 애통해하였다. 아, 김성일은 옛날의 유직(遺直)이라고 할 만하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鶴峰集, 懲毖錄,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東儒師友錄, 壬辰戰亂史(李烱錫, 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 1967), 1583년의 한 訴良事件과 壓良爲賤(임상혁, 2002년)
國譯鶴峰全集解題·附錄(李翼成外譯, 鶴峰事業會, 1976)
金誠一是非(成樂熏·姜周鎭, 月刊中央, 1975. 12.)
鶴峰先生의 學問思想의 경향(李相殷, 國譯鶴峰全集, 1976)
鶴峰先生과 壬辰義兵活動(許善道, 國譯鶴峰全集, 1976). 〈李完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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