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직선적인, 그래서 더욱 아픈, 우리의 현대사

느낌표 선정도서이자 재작년 국방부 불온도서로 선정됐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의 현기영이 10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 《누란》. 1980년대와 2000년대를 걸친 한 운동권 출신 지식인의 좌절과 체념을 허무의 비판으로 일관한 소설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의 주된 시간적 배경은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이다. 때 아닌 황사가 두 달 남짓 지속되면서 서울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은 그 해, 마치 고대 중국의 왕국 누란(樓蘭, Lou-lan)을 삼켜버린 모래바람처럼 전국이 월드컵 열기로 뒤덮였고, 그 이면에 가려진 무비판적 대중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작가 현기영은 《누란》을 집필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허무성이라는 한 젊은 지식인의 전말에 관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악명 높은 남산 기슭의 한 지하실에서 시작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386 막내 학번인 허무성. 허무성은 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고군분투하지만 검거와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배신자로 전락한다. 돌아갈 곳 없는 허무성은 가해자의 주선으로 일본유학을 떠나고 대학교수라는 신분으로 이 사회에 복귀한다. 그를 고문했던 김일강은 정치검사였고 수구보수이론을 강변하는 인물이다.

그를 통해 오늘날 보수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있고 그들이 다수 대중을 지배하는 통치방식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이들이 도리어 사회에 의해 변화된 사실에 주목한다. 대학교수로 복귀한 허무성은 2000년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80년대와 다른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항과 비판보다 소비와 물질중심.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 습득보다 취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오늘날 대학생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가치관에 논쟁을 벌린다.

작가는 주인공 허무성을 통해 80년대와 2000년대의 사회상과 그 사회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다.

《누란》에서는 행복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다들 실패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독재에 맞서 열심히 싸운 386세대 덕에 대한민국도 자유와 민주화가 온 듯 했지만, 자유를 찾은 이들은 이전 시절을 새까맣게 잊어버렸고 신자유주의의 망령에게 영혼을 바쳤다.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겠다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의 꼬드김에 너도나도 소비하지 못해 안달 났으며,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쓴 호소문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까 걱정하고, 길에서 죽은 노숙자가 무관심 속에 며칠씩 방치되다 쥐에게 귀를 뜯겼다. 미군 장갑차에 깔린 여중생들의 비명소리도 시청과 광화문을 가득 메운 군중들의 함성 소리에 묻혀 버렸다.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된 군중들 속에서 허무성도, 문정선도, 이종구도 옛 왕국 누란처럼 돼버렸다.

이 소설에서 허무성은 월드컵에 홀려 광분하는 빨간색 군중 틈에 섞여 있다가 쓸쓸하게 노숙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모든 관계를 끊고 과감하게 추락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 구조조정을 당할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구조, 그 체재에서 탈퇴하는” 행위였고, “지상(地上)은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지만, 이곳은 무소유… 사람들이 바삐 오고가는 역전광장, 지하도, 그리고 공원 같은 곳에서 굼벵이처럼 느리게 꿈틀거리는” 절망의 마지막 거처였다.

결국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숙생활을 택하게 되는 주인공 허무성의 행로는 급변하는 세대적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체 저마다의 가치를 앞세워 경쟁하는 모든 이에게 진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누란》은 고대왕국 누란을 삼켜버린 황사처럼 우리사회를 휩쓸고 있는 무비판적 대중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작가는 에세이 같은 형식으로 우리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던지는 우려를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그 철저한 절망으로 바닥을 치고 나면 희망을 발견할 것이라는 바람도 전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민주적 가치에 대한 믿음과 개인들의 헌신으로 사회 민주화가 진전되었으나 물신주의, 배금주의에 지배당하게 된 오늘의 세태를 386세대를 주인공으로 비판적으로 조명한 역작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