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용식 공학박사·건축기술사·수필가

아내가 거실에서 넘어져 오른쪽 어깨가 부러졌다. 수술 전후 X-ray 영상에서 흩어진 뼛조각과 열 개가 넘는 나사못을 보니 부스러졌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사고는 되돌릴 수 없는 일, 고관절이나 머리 쪽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서로를 위로했다. 3월 말 아내와 함께 가기로 했던 ‘2024 홍콩 아트 바젤(Art Basel) 전시회’ 일정을 취소했다. 5일간의 입원이 끝나고 퇴원하자 나는 아내의 오른팔 역할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누군가의 오른팔 역할을 한 적이 있었는지를 새삼 생각해 보기도 했다.

집 안 청소나 빨래는 평소에 조금씩 거들어 줬으니 어렵고 힘든 일은 아니었다. 왼손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거나 칫솔질해 주는 일도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항상 푸짐하고 다양한 음식 만들어 먹기를 좋아한 아내를 대신해 삼시 세끼, 식사 준비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가끔 지방에서 혼자 지낼 때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만의 방식으로 조리해 먹었지만, 이제는 주부 고수인 아내의 식단과 입맛에 맞춘다는 게 간단치 않은 일 같았다.

퇴원 후 첫날 신김치 콩나물국을 해 먹기로 했다. 다시마와 다시 멸치 국물을 우려내고 묵은김치와 콩나물을 넣고 끓였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대파를 어슷하게 썰어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다. 콩나물의 아삭한 식감에 새삼 대파의 상큼한 향내가 느껴져 맛있었다.

열무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다. 마트에 가서 장바구니 들고 아내가 불러 준 메모지를 보며 이리저리 눈길을 주는 데 익숙하지 못해서인지 어색했다. 열무 한 단과 대파와 양파 등 양념거리를 샀다. 주방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열무를 다듬는데 나는 과도를 들었고 아내는 식칼로 하란다. 열무를 다듬고 잎을 삼등분 내는데 무슨 식칼이냐고 대꾸했더니 오랜 주부의 경험에서 하는 말이니 시킨 대로 하란다.

‘시킨 대로’가 머리에 박히며 앞으로 오른팔 역할이 만만치 않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밀려왔다. 열무 씻을 때는 아기 다루듯 서너 번 살살 씻으라고 해서 손자 뺨 어루만지듯 세 번을 씻고 채반에 옮겨놓으려니 “한 번 더” 한다. 아, 서너 번이라는 말은 최대치 네 번을 의미하는구나. 아내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물을 뺀 열무에 굵은소금으로 숨을 죽이는 동안 양념을 준비해 놓으란다. 빨간 풋고추 세 개, 마른 고추 여섯 개와 양파 한쪽을 대충 썰어 놓으라 해서 시킨 대로 했다. 마늘 일곱 톨과 어른 손톱만 한 생강 한 톨까지 준비한 양념 모두를 믹서기에 넣었다. 여기에 멸치액젓 반 컵, 새우젓 두 숟갈, 고춧가루 세 숟갈에 물 반 컵을 붓고 믹서기를 돌렸다. 대파 두 뿌리라 했는데 눈치껏 세 뿌리를 어슷하게 썰어 놓았다. 중간중간에 얼마나? 됐어?를 반복해서 물었다. 말대꾸 없이 ‘시킨 대로’하는 것이 불필요한 마찰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으니까. 아내의 지시와 대답의 권위에 나는 점점 작아져 갔다.

20분쯤 후 소금에 절여 놓은 열무를 조심스레 뒤집어 준 다음 채반에서 소금기를 씻어냈다. 다시 대야로 옮겨 믹서기에 갈아 놓은 양념과 대파를 넣고 골고루 뒤적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깨와 참기름을 뿌려 다시 주물럭거렸다. 비닐장갑의 감촉이 묘하다. 손맛이 아니라 비닐 맛이 나면 어쩌지. “어디 간 한번 봐봐” 열무 한 줄기를 입에 넣어주니 “좀 싱거운 것 같은데. 지금 조금 짜야 내일쯤은 간이 맞을 거야” 새우젓 한 숟갈로 간을 맞추란다. 맛있었다. 하얀 쌀밥이 생각나며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그날 이후 육개장, 갈비탕, 김치찌개 등을 끓일 때마다 대파는 빠지지 않는 재료이고 여러 잡냄새를 없애주며 음식의 풍미를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대파 맛에 길들이다 보니 라면을 새롭게 끓이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다. 면발이 익을 때쯤 수프는 절반만 넣고 묵은김치 조금과 대파와 양파를 듬뿍 넣는다. 라면의 고유한 맛은 약해지지만, 싱싱한 건강식 같은 식감이 느껴져서 간편식으로 가끔 조리해 먹는다.

우리나라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대파가 궁금했다. 식이섬유가 풍부해 장운동을 원활하게 하여 숙변 제거에 효과가 있다. 육류나 볶음요리처럼 지방 성분이 많은 음식에 대파를 함께 섭취하면 콜레스테롤이 체내 흡수되는 것을 억제한다. 중국 음식에 대파를 많이 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또한 위장을 따뜻하게 만들고 노폐물을 배출시킨단다. 칼륨이 많이 들어있어 나트륨의 원활한 배출을 도와 고혈압 예방에 도움을 주며, 전골 찌개를 끓일 때 대파를 송송 썰어 넣어 고기의 잡냄새 잡기에도 좋단다. 이뿐만 아니라 더 많은 효능이 있다고 하니 대파는 주방의 감초 같은 채소임이 분명하다.

아내와 40여 년 함께 살면서 가장으로서 한눈팔지 않고 나름 잘해 줬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그것은 기본이고 따로 성이 차지 않은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번 사고를 통해 그동안 부족했던 사랑을 채워달라고 청구서를 내민 것 같다. 서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끼리도 주고받는 사랑의 총량이 정해져 있을까. 이제 와 새삼 무게를 달아 볼 수도 없는 일. 뒤늦게 대파 맛을 알아가듯 부부간에 미운 정보다 고운 정을 찾아 균형추를 맞추면 어떨까. 아내의 다친 어깨는 많이 회복되어 가지만, 창밖의 꽃잎은 바람에 휘날리고 속절없이 봄날은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