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하 서상록은 젊은 나이에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에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남다른 애향심으로 아무런 사심 없이 고향에 전기, 전화시설을 해 주고, 나주시민회관과 봉황 면민회관(복지회관), 그리고 1950년대에는 나주고등학교와 봉황초등학교를 개축해 희사하시는 등 고향발전에 엄청난 사재를 털었다.

지금도 금하장학회를 세워 전국 각지의 후학 양성에도 발 벗고 나서시는 등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훌륭한 나주의 인물이다.

1910년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시기적 상황 때문에 마을 사람 가운데 열에 아홉은 굶다시피 했고 그나마 먹을 것이 있다 해도 보릿고개가 닥치거나 흉년이 들면 나물이나 피죽으로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다.

남의 토지를 맡아 부치는 소농(小農)이었던 아버지는 후에 영암 등 어촌을 찾아가 어물을 받아다가 나주 인근 동네를 돌며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서상록은 풀이나 벌레의 이름부터 온갖 것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한번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이런 천성은 좀 더 자라서는 자연스럽게 수를 헤아리거나 날짜 꼽는 법을 배우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여섯 살이 되자 서책을 끼고 서당에 다니는 형들이 부러워 보여 매일 서당 벽에 기대어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로 하루해를 보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본 부모는 그가 일곱 살이 되자 집안 형편을 돌아보지 않고 서당에 보내 주었다.

당시 스물이나 서른 집에 하나 꼴로 서당에 나가 천자문이나 떼어 제사를 지낼 때 지방이나 축문을 쓸 정도면 대단히 유식한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일제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나주에도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져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으나 철야에서 학교를 다니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철야는 그런 보통학교마저 없었다.

서당에서 배우기 시작한 천자문은 풀이나 화초, 새나 벌레의 이름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서당에서 하루에 몇 자를 배우고 돌아온 그는 오는 길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지우고 쓰고 지우고 또 쓰기를 반복하였다.

밤이 이슥해 잠을 청하며 누워서도 허공에 손가락을 쳐들고 붓글씨를 쓰는 흉내를 냈다. 훈장 선생님이 가르쳐준 한 자 한 자의 오묘한 뜻을 골똘하게 떠올리며, 조상들은 어찌 그리도 신기하고 대견한 것을 만들어 냈을까 하고 혼자 감탄하곤 하였다.

먹 가는 법, 불 놀리는 법을 배워 습자를 하게 되면서 즐거움이 더해졌다.
실제로 종이가 위낙 귀한 터라 제대로 지필묵을 갖춰 습자를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선배들이 얼러주는 대로 나무판에다 밀가루와 참기름을 겹쳐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는 습자판을 만들어 그 위에 몽당붓으로 먹자욱을 남겼다간 물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되풀이 하였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된 서상록에게 엄격한 시간 관념이란 것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공부는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는 친구들과 차츰 멀어졌다. 그래서 서당에 다녀오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풀더미를 운반하는 정도 일만 하고는 줄곧 글공부에만 매달렸다.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대견스러웠던지 나중에는 아예 잔심부름조차 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 덕에 공부에서는 언제나 남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선배들과 더 가까이 지내며 배운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잦았다.

그런 서상록이 훈장 선생님이나 선배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훈장 선생이 몸이 아파 가르치기를 거르게 된 날이면 으레 서상록에게 학생들을 대신 가르치도록 하였다.

세지에 살았던 훈장 이성국은 다른 학생들 앞에서 듣기 민망할 정도로 서상록을 칭찬하였다.

"일취월장이라더니 그게 바로 상록이의 공부를 두고 하는 말인 줄을 너희들도 알아야 한다. 해마다 정월이 있고, 매일 아침이 있듯 인생에도 때가 있느니라. 늙기는 쉬워도 공부를 이루기는 어려우니 상록이를 본받아 제 때에 공부를 해야 하느니라."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