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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을사의병장 박민수 ③100-150명 이끌고 독자적인 의병투쟁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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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호] 승인 2008.08.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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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심남일 휘하에 있다 1908년 나주로 이동

 박민수 의병부대가 활동한 시기는 대략 1908년 겨울을 전후로 적게는 50-60명, 많게는 100-150명의 부하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다시, 문평, 동강, 나주읍 등지를 무대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에 박민수와 박민홍(朴珉洪)이 같은 시기와 같은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 硏究)』를 편찬한 홍순권(洪淳權)은 박민수와 박민홍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를 저술한 홍영기는 박민수는 박민주 또는 박인수로 불리었으며, 박민홍은 전해산 또는 심남일의 부하에 속하였다가 1909년 나주에서 독자적인 의병 투쟁을 전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 당시 의병에 참여한 계층이 농민, 상인, 유생 등 다양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진.
 박민홍이 1909년 2월 27일 영암 금산(金山)에서 전사했을 때 나이가 40세였다. 『나주군지』에 박민수는 밀양(密陽)이 본관으로 고종 을사년(高宗乙巳年), 1869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박민홍과 박민수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나이와 의병활동 무대, 의병투쟁 시기가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박민수와 박민홍은 동일 인물로 추측된다.

 박민수와 박민홍이 동일 인물라면 박민수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이후에 전해산 또는 심남일의 부하로 있다가 1908년 11월, 나주로 이동해 독자적인 세를 떨친 것으로 유추된다.

 1907년 가을에 창설된 기삼연의 연합의병진이 해체되자 1908년 3월 함평의 유생 심남일(沈南一)이 남평에서 봉기하여 호남지역 서남부를 중심으로 의병투쟁의 새장을 열었다. 남평에서 봉기할 때 박민수가 심남일 의병부대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빠른 시기에 대규모 병력을 형성하여 함평을 근거지로 나주, 영암, 무안, 강진 등 전라남도 서부지역과 남부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일제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의병장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고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은 전해산(全海山)이다. 1908년 하반기에 들어 호남지역 의병운동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은 전해산 봉기였다.

그는 이석용의 전북 진안 봉기 때에 그의 참모로 참가하였으나, 그해 5월 남하하였다. 조경환의 함평 봉기에 가담했다가 7월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하게 된다.

박민수 의병부대에 함평 봉기에 가담한 산포수(山砲手)가 상당수 배치된 점은 박민수가 전해산의 부하로 있다가 독립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해산의 의병부대의 주력은 전라남북도 각지의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 정원집을 비롯해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일부 병력이 의병부대의 구성원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전해산 의병부대는 지금까지의 다른 어느 의병진보다 강력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나주, 광주, 장성, 담양 등 전라남도 북부의 내륙지방과 영광, 무장, 고창 등 전라남북도 접경의 서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전해산은 휘하에 여러 개의 소부대를 거느리고 각지에서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박민수 의병부대 또한 전해산의 소부대 중 하나로 연합투쟁을 전개했을 것으로 보인다.


3-4일에 한 번씩 일제 토벌군 전열 교란

 박민수가 누구의 부하로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전해산 또는 심남일의 부하로 활동하다 1909년 독자세력 또는 전해산의 소부대로 의병투쟁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주경찰서장과 목포 일본인상업회의소에서 1909년 1월에 ‘1월 중 전남에 있어서의 폭도 피해 정황’이라는 내용을 전남 경찰국장에게 발송한 자료에 박민수 의병부대의 규모와 그의 활동무대, 그리고 의병투쟁 상을 살펴 볼 수 있다.

‘박민수 부대(여기서 박민수를 朴仁守로 적고 있다) 약 90명이 1909년 1월 7일 나주군 두동면(豆洞面, 지금의 동강면)에서 출현했다가 그 인근을 정탐한 뒤 곡강면(曲江面, 지금의 동강면)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흘 뒤 11일에는 박민수 부대(여기에는 박민홍이라고 나옴) 50명이 용문면(지금의 문평면) 문암리에 나타나 나주 헌병분소 헌병과 전투를 벌인 뒤 신걸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3일에는 약 50명을 인솔하여 거평면(居平面) 부호(富豪) 김성기 집을 습격하였으나 의병부대가 들어 닥친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성기가 도망을 가 그곳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은신처로 돌아갔다.

 16일에는 약 50명을 거느리고 수다면(지금의 다시면)에서 마산면(馬山面)으로 향하는 배 한척을 빼앗아 쌀 40석을 강탈하기도 하였다. 20일에는 약 150명을 인솔하여 수다면 초동에 들어와 부호들의 집을 습격하여 돈을 강탈하였다.

 나주경찰서에서 보고한 1909년 1월 중 폭도피해 정황에 따르면 박민수는 3-4일에 한 번씩 적게는 40-50명에서 많게는 150명을 인솔하고 산악전을 벌이는 등의 수법으로 의병 토벌군의 전열을 교란시켰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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