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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모처럼 휴식을 취한 최부 일행
식사시간이 되자 허청이 최부를 불렀다. 같은 탁자에 앉게 되었는데 한사람이 젓가락으로 탁자에 이렇게 썼다.
“고기를 먹겠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을 지키는 3년 동안에는 생선과 고기, 매운 채소, 젓갈 같은 것은 먹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지요.”
최부의 말을 들은 그는 큰 그릇 가득히 푸짐한 야채와 푸성귀를 주었다. 오래 만에 먹어본 넉넉한 밥상이었다. 허청은 최부의 옷이 습기에
젖어있는 것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햇빛이 나니 벗어서 말리시오.”
“그러고는 싶지만 내 옷이 모두 젖어서 이 옷을 벗으면 그 사이에 입고 있을 옷이 한 벌도 없어서 엉거주춤 이러고
있습니다.”
“남자들만 있어서 볼 사람도 없으니 홀랑 벗어서 말리구려.”
“하하하.”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컷 웃고 난 허청은 최부를 양지쪽으로 끌고 갔다. 햇볕이 드는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입고 있던 옷을
말려야 했다. 조선 사대부의 비참하게 무너진 자존심이라 하겠다.
최부가 담 밑에 앉아 옷을 말리고 있는 동안에 한 관인이 와서 물었다.
“당신의 나라에도 황제가 있소?”
“조선이나 명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마다 그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있는 법이요. 다만 조선에서는 왕이라 부르고 명나라에서는
황제라 부를 뿐입니다.”
“조선에서 관복을 입을 때는 정말로 모두 물소의 뿔로 만든 띠를 허리에 두릅니까?”
“1·2품은 금 띠이고 3·4품은 은띠이며 5·6품은 모두 검은 뿔로 된 띠를 두르지만 물소의 뿔로 만든 띠는
없습니다.”
“당신네 나라에서 금은이 산출되오?”
“조선에서는 금은이 나질 않고 다만 중국에서만 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금, 은띠를 두른단 말입니까?”
“모두 중국에서 들여와 귀하게 여기며 씁니다.”
묻기를 계속한자는 설민(薛旻)이라는 사람으로 파총관이 파견한 사람이었다. 도저고성에 빨리 가서 성안의 주민들과 최부 일행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은 자였던 것이다.
우방국 표류 민들을 정중히 보호하여 사리분별이 바르게 하라는 특별지시를 받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때 또 한 사람이 최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는 영파부 정해위(定海衛) 사람인데 이곳 도사(都司)공이 보내서 온 사람이오.”
“영파부 하산(下山)은 최초로 우리 일행이 배를 댔던 곳인데 맞습니까?”
“그러하오. 영파부 속에 하산이 속하오.”
그러자 최부는 그에게 말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뭍에 오른 곳이 하산이었는데 그곳에서 날강도 같은 해적을 만나 다시 바다로 쫓겨나는 처참한
꼴을 당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알아들었다며 이 문서를 상부에 보고할 것인즉 알고 싶거든 거기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서로 지필묵을 가지고 모여든 그들은 바다에서 격은 일들을 물어왔다. 너무 혼란해서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나중에는 도저고성의
관리가 나와서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경박하니 그들과는 함부로 아무 말이나 하지 마시오.”
무서운 독수리눈으로 주의를 주었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 날씨가 매우 맑았다. 어제와 다름없이 문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최부 일행을
살펴보며 구경하느라 혼잡했다.
파총관 유택의 심문을 받다
도저성의 관리인 왕해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물었다.
“이 사람을 아시오?”
최부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모른다고 최부가 대답하자 그는 그림을 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당나라 시절 진사였던 종규라는 자입니다.”
“종규는 평생토록 진사를 못한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진사라고 합니까?”
그러자 그는 껄껄 웃어댈 뿐이었다. 마침 최부의 곁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백발노인이 와 있기에 그에게 물었다. 먼저 최부는 이곳에 대하여
궁금했다. 몇 해 전 여러 가지 책을 편찬하면서 알아두었던 중국지리의 궁금한 것들을 알고자 했다.
“천태산(天台山)과 안탕산(雁蕩山)은 여기서 얼마나 떨어졌나요?”
“천태산은 천태현 북쪽에 있는데 여기서 이틀쯤 가면 되고, 천태산 남쪽에서 하루쯤 가면 안탕산이 있소.”
“그러면 도저성의 주산(主山)은 어느 산입니까?”
“석주산(石柱山)이오.”
노인은 최부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문밖으로 나와 먼 곳의 산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저 돌기둥들이 우람하게 서있는 산이 석주산이오.”
석주산은 이름처럼 불끈 솟아오른 기둥 돌들이 볼만했다. 도저성의 남쪽에 서있는 산은 안산이면서 주산이었다. 다시 최부가 물었다.
“여기서 북경(北京)까지는 얼마나 됩니까?” “대략 6천리쯤 될 것입니다.”
최부가 가장 궁금해 한 것은 양자강이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양자강가에 모여 농사를 지며 살아가는 강은 중국대륙의 젖줄이며 중국을
상징하는 강으로 인류문명을 꽃피웠던 곳이다.
“양자강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이곳에서 북쪽으로 2천리쯤에 양자강이 있소.”
“양주부(楊洲府)는 도저성에서 얼마나 가면 됩니까?”
“양주는 양자강 위에 있는데 두개의 물줄기가 합해진 곳에 있어서 양주라 부르는 곳으로 앞으로 당신들이 강을 건너가게 될
것인즉 거기가 양주 땅 입니다.”
“남경(南京)까지는 몇 리나 되나요?”
“남경은 대륙의 서쪽으로 가야하오. 양자강을 따라 고원지대로 가면 나오는데 2천여리쯤은 될 것이오. 그렇지만 거리는 추측한
거리로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이 무렵 도저고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황화관(皇華館)으로 당당한 모습의 관리가 들어왔다.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껏 거드름을
피면서 등장한 그는 왜군을 막는 파총관 유택이었다. 그는 최부를 불러들인 다음 말했다.
“당신들과 같이 몰래 국경을 침범한 자들은 군법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소. 더군다나 왜구들의 침략이 잦아 먼저 죽이고 난 다음
사후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오. 다만 사정이 급박해서 처형을 잠시 미루고
있는 것 일뿐이니 당시 침범여부와 정황을 글로 써서 사실대로 공술하라.”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큰 그는 도저성을 압도했다. 조금 겁을 먹었지만 최부는 사실대로 말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니 지루하고 맥이
빠졌지만 빠짐없이 적어서 알렸다.
파총관 유택이 다시 물었다.
“당신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언제이며 역임했던 관직은 무엇이었소? 수행원들은 어디에 사는 자들이며 짐 꾸러미 속에 들어있는
것은 무엇이고 또 타고 온 배는 몇 척이나 되오?”
최부는 거짓 없이 대답했다. <다음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