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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 지대장 나월환 ④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나월환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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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호] 승인 2007.12.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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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월환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에 일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협동전선과 신간회 결성에 반발하여 보다 강력한 반일, 반공산주의적 조직으로 개편을 꾀하였다.

아나키스트 조직인 흑풍회(黑風會)의 원심창, 장상중, 한하연, 이시우 등이 박열과 흑우회(黑友會) 유지를 받들어 1928년 1월 15일 반공주의 노선을 분명히 밝히고, 흑우연맹(黑友聯盟)을 결성하였다. 흑우연맹 창립 회원들의 명단에 나월환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그는 1928년 이후에 가입한 듯하다.
 
나월환이 1927년 이전에 일본에 건너왔다면 흑우연맹의 전신이었던 흑우회 또는 1927년 2월에 결성된 조선인단체협의회에 참여했을 것이다.

또한 독자적인 항일운동과 사상투쟁을 전개했었던 흑우동맹 명단에 올라 있어야 한다. 1928년이면 나월환의 나이는 17살로 아직은 무정부주의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부족할 나이다.
 
성성중학교에 입학한 뒤 나월환은 조선인 선후배와 교류를 하면서 1928년 이후 자연스럽게 무정부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아나키스트들의 기숙사인 계림장(鷄林莊)에 합숙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청년전진공작대를 함께 결성했던 이하유, 박기성과는 흑우연맹에 가입하면서 첫 인연을 맺게 된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반대와 민족부르주아 및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면서 청산학원을 다니던 나월환은 1931년 장개석 총통의 친위대장인 전대균을 동경에서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나월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으로 건너 가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

 전대균을 따라 중국 북경으로 간 그는 일본에서 함께 활동했던 아나계통 청년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그해 9월 상해로 이동하였다.

그때 북만주에서 투쟁을 중단하고 대륙으로 들어온 정화암, 이강훈, 정해리(鄭海理)·유자명, 유산방(劉山芳), 이회영, 백정기, 원심창 등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면서 이 단체가 활성화 되고 있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결성 후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친일 매국노의 활동에 대한 경고를 취하는 선전활동과 무정부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등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던 차에 새로운 활동가 들이 들어오면서 활기를 띄게 된다.
 
중국으로 건너온 나월환은 양여주, 김지강, 유서, 엄형순, 이용준, 원심창, 박기성, 이하유, 김광주 등 혈기왕성한 30여명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1931년 9월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여하였다.

이들 중 청년연맹의 성격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인물은 초기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을 주도해왔으며, 결성에 적극적이었던 이회영, 유자명, 정화암, 유기석, 백정기, 정해리 등이었다. 나월환은 당시 20세로 청년연맹의 핵심 구성원은 아니었다.  
 
백범 김구와 연결이 되어 있었던 청년연맹은 1932년 5월 백범과 모의해서 남화연맹을 중심으로 서간단(鋤奸團)을 결성하여 반민족자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정화암과 김구와 분화로 야기된 연맹원의 탈퇴와 항일 의열투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연맹원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1930년대 중반이후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여기에 나월환과 박기성 등이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입학 등으로 전투력은 더욱 악화되었다.
 
강한 조직력을 갖지 못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단발적인 의열투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지만 연맹원의 분산과 죽음으로 전투력이 악화되자 1930년대 중반이후 활동을 접어야 했다.
 
어느 단체에 가입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남화한인연맹에 가입할 때 나월환은 한국혁명당에도 들어가 활동을 하게 된다.

한국혁명당은 윤기섭, 신익희, 연병호, 성주식, 민병길 등이 1929년 남경에서 조직한 정당이었다. 구성원은 대부분 임시정부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는데, 근거지를 옮기면서 임시정부나 한국독립당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정당을 조직했다.
 
이 당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편, 산하에 철혈단을 두어 무력행동대로 삼았다.

철혈단 주요 인물로 안재환과 김창화 그리고 나월환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시기는 대략 1933-1934년 사이로 추정된다.

1931년 9월 중국으로 건너온 나월환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함과 동시에 한국혁명당에 가입하여 1933-1934년 두 단체의 주요인물로 성장하였다.
 
한국혁명당은 기관지로 『우리 길』을 발간하여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단원 훈련과 교양에 이바지하였다.

나월환이 입당했을 때 당원은 40명 정도로 간부는 이사장 윤기섭, 총무는 정태희, 외무는 신익희가 맡고 있었다.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모색하던 한국혁명당은 1934년 2월 25일 만주 한국독립당의 대표 홍진과 김원식,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헙, 연병호가 남경에서 협희하여 각 당을 해체하고 ‘신한독립당’을 결성하게 된다.

황포군관학교 입학

 이 때 허난성(河南省) 낙양 소재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일특별반이 설립되자 나월환은 1934년 2월 입교하게 된다.

중국군관학교(중국에서는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러짐)는 중국 국민혁명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24년 1월 광저우에 설립된 군사교육기관이다.

1929년 9월 7기생을 배출한 다음 1931년 폐쇄된 황포군관학교는 1927년 후반기 국공합작의 파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분교 중 가장 많은 한인이 입교하였다. 교육기간은 3년이었으나, 국민혁명의 인적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실제 교육기간은 1년 이내로 단축되었다.
 
한인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경위는 상하이에서 입교생 모집활동을 주관한 국민당정부의 실력자 천귀푸(陳果夫)가 조소앙, 박찬익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세력이 추천한 한인을 광저우로 보내면서 입교가 시작되었다.

한인의 입교는 의열단(義烈團)의 경우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의열단 지도부는 중산대학과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통한 자기무장의 길을 선택하였고, 김원봉(金元鳳) 등은 쑨원과의 면담에서 황포군관하교 입교를 허락받았다. 또 여운형(呂運亨)은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정부 주요 인물들과의 유대관계를 매개로 한인의 입교에 공헌하였다.
 
『황포군교동학록』에서 확인되는 한인입교생을 살펴보면, 3기생(1925.7-1926.1) 이빈, 이일태 등 5명, 4기생(1926.11-1927.8) 김원봉, 최림 등 24명, 5기생(1926.11-1927.9) 신악, 안유재 등 5명, 6기생(1928.4-1929.5) 김정문, 이춘암 등 9명, 7기생 이석, 8기생 이근호, 나월환 2명이다.
 
8기생인 나월환은 입교 중 체험한 중국 국민혁명의 논리와 국공합작 원리를 기반으로 졸업 후 중국군에 복무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이시기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독립운동가들은 나월환처럼 중국군에 복무하는가하면, 국내외에서 확산되던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참여하는 인물, 공산주의 운동과 아나키즘 운동 등 이들과는 또 다른 항일행로를 개척해 간 인물들, 참으로 다양한 면모로 한국 현대사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졸업 후 항일투쟁 과정에서 남긴 발자욱의 모습은 달랐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조국광복, 민족해방으로 합일되었고, 그 출발은 황포군관학교에서 현장 체험한 국민혁명의 논리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특히 4기생 출신인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와 황포동학회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한인독립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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