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가까이했다. 집을 나서서 귀가할 때까지 장르 구분 없이 들었다. 올드 팝에서 세미 클래식으로 취향이 점점 단순해져 갔다. 그의 정비공장에는 항상 음악이 흘렀다. 손님들도 지루하지 않다며 좋아했다. 음악에 빠져들면서 강퍅하고 거칠었던 아버지의 트라우마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용서할 수 있는 여유와 배려할 수 있는 마음 밭이 형성되는 듯했다. 항상 웃게 되었다. 

 

가난이 싫었다. 기왕이면 돈 많은 집에서 중매 들어오기를 원했다. 학벌은 없지만, 사업이 잘되고 있으니 그런 기대를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형수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덕성스럽고 착하게 보인 아내를 보자 금방 생각이 바뀌었다. 여자는 집에서 아이들 잘 키우며 살림 잘하면 제일 아닌가. 더구나 부모에게 너무 잘하고 동생들도 잘 챙긴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당시 아내는 마산에서 시계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마쳤지만, 오빠가 고등학교만 마쳤는데 딸이 대학까지 가겠다고 우길 수가 없었단다. 매일 편지를 쓰고 우체통을 쳐다봤다. 진해 군항제에 맞추어 김밥 싸 들고 가서 프러포즈했다. 예식장을 예약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모시고 살지는 않았지만, 비로소 아버지에게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자기가 얼마나 불효자인지를 스스로에 물었단다.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밀려드는 일 때문에 휴일이 없었고 땀에 전 쉰 냄새가 싫기 시작했다. 자식들 미래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쉰 냄새 맡으며 아등바등 살아갈 바에야 자식들이라도 넓은 세상을 보며 키우고 싶었다. 고민하며 망설이다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남보다 뛰어난 정비 기술이 있다는 자신감이 영향을 주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여섯 시에 시작하는 영어학원에서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캐나다에 이민했다. 경험 많고 손기술이 좋아 자동차 정비회사에 쉽게 취업했다. 부지런하고 일 처리가 꼼꼼해 인기가 많았다. 특히 주말을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한국에서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부모님과 찍은 사진을 가져오라는데 사진이 없어 아들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서 들었다. 아들에게 함께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못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했다. 아빠의 자책감에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아들은 순간 당황하면서도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지나버린 세월을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는가.

 

지역공동체가 주관하는 ‘아버지 학교’에 등록했다. 아버지의 의무와 역할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토론하였다. 참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아빠의 권위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자상하며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 갔다. 만약 서울에서 그대로 살았다면 아이들 깨어나기 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잠든 모습을 보는 나날이 지금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주말에는 항상 아이들과 여행을 다녔다. 3년 6개월 만에 시민권을 받았다. 

 

국적은 캐나다, 한국 영주권. 8년여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애들이 커가면서 대학은 한국에서 보내고 싶었다. 주변에서 그렇게 권하기도 했었다. 강남 복판에 외제 차 전문 카센터를 오픈했다. 애들도 한국 생활에 금세 적응해 좋은 대학을 나왔다. 아들은 국내에서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딸은 캐나다에서 고양이(cat) 인연으로 만난 베트남 남자와 결혼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사위가 잘 나가는 젊은 사업가여서인지 장인, 장모에게 극진히 대한다고 또 자랑이다.

 

열다섯 살부터 일찍 객지를 떠돌다 보니 힘들었던 기억이 많다고 했다. 해거름에는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나서 눈물 훔칠 때도 많았다. 지금도 건강한 처와 아들딸, 손자가 있어도 슬퍼지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릴 적 감정은 나이 들어도 오래도록 남는 모양이다. 아쉬운 것은 아버지에 관한 생각이다. 지난 일이었지만 안타까운 기억이다.

 

시간 나면 가끔 집 근처에 있는 그의 카센터에 들른다. 처음 자동차로 인연을 맺었지만, 나를 볼 때마다 더욱 곰살맞게 굴며 스스럼없이 대한다. 작업 없는 틈틈이 지나온 삶 조각조각을 들려준다. 

 

“나는 지금까지 결핍과 열등감에서 벗어나려 브레이크 없는 페달처럼 달려온 것 같아요.” 어? 이 말은 내 이야기잖아. 부족하니 채워야 했고 또 빈 곳이 생기면 다시 채우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생겼었지. 결핍과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그와 조금 달랐다. 그는 스스로 길을 만들었지만 나는 그 과정에 사람이 있었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아팠던 경험은 세포 깊숙한 곳에 잠복해 있다가 아메바처럼 긍정의 에너지로 커 가는 것 같다. 요즈음은 자동차 제조 기술이 좋아 고장이 별로 없어 카센터도 사양산업이란다. 그래도 음악이 흐르는 카센터에서 그는 항상 바쁘다.

 

그의 아내가 튀르키에 여행 예약했다고 또 자랑이다. 그가 “무슨 돈으로?” 물었더니 그동안 갓난아이 돌봄 일하면서 돈을 모았단다. 당신 그늘에서 잘 살았으니 자기도 한 번쯤 보답하겠다면서. 

 

“형님, 다음에 올 때 차 가지고 와, 여름도 되고 하니 전반적으로 점검 한번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