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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 지대장 나월환 ②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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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승인 2007.12.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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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월환이 어렸을 때 일이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송죽리에 간혹 항일의병이 들어와 며칠 지내다 가곤 하였는데, 이 정보가 일본 헌병에게 전해졌다. 헌병은 호구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에 들어와 의병들이 숨을 만한 곳을 수색하면서 횡포를 부렸다. 나월환의 집에도 들이닥쳐 집 곳곳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마루에서 긴 담뱃대를 물고 지켜보던 나월환의 아버지 나종성씨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일본 헌병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의병을 잡지 못해 안달이었던 헌병에게 나씨의 불친절한 행동은 불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곧바로 일본 헌병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건방진 놈, 저놈을 마당에 눕혀라!”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잘못했다”고 빌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더 떳떳하게 대들었다.

   
▲ 아버지의 강직한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월환은 어린 시절 아버지 속을 무척 썩이는 말썽꾸러기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헌병들의 발길질은 거세졌다. 마당에서 몰매를 맞은 그는 한 달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강직한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월환은 어린 시절 아버지 속을 무척 썩이는 말썽꾸러기였다. 그래서인즉 그의 아버지는 월환이가 말썽을 피울 때면 인정사정없이 매를 들었다. 하루는 나월환이 또 사고를 쳤다.

이 일화는 나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기성 장군이 나 장군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다.  그날도 아이들을 모아 놓고 연사로 나선 월환이는 동네 창고에서 몰래 멍석을 가져왔다.

아이들을 멍석에 앉혀놓고 일장 연설을 끝낸 그는 멍석을 그대로 두고 친구들과 함께 다른 놀이를 하러 떠났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멍석주인이 나월환의 아버지에게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월환이 아버님! 아이들이 멍석에 앉아 월환이어 연설을 듣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연사놀이가 끝나면 멍석을 제자리에 갖다 놔야 되잖아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버지가 찾는다는 이야기를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은 월환이는 문득 화가 난 아버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연히 동네 길 모퉁이에서 아버지와 마주치게 되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월환은 아버지를 보자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한번 작정한 일은 황소고집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아버지 또한 눈앞에서 도망치는 나월환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이 골목 저 골목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다 나월환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아버지에게 잡히면 아마 맞아 죽을지도 몰라”
 
순간 뇌리를 스쳤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나월환을 향해 아버지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그와 동시에 그는 길에 널브러진 가느다란 나무막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서는 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길 앞에 줄을 그었다.

아들의 엉뚱한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 아버지를 향해 나월환은 말했다.

“이 선을 넘어오면 내 아들이요.”

아들의 엉뚱한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고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이창동 계산마을에 사는 나종성씨의 외손자 이동흠씨는 유년시절 외할아버지를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존재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월환 장군의 생김새는 할아버지를 똑 닮았어. 어렸을 때 할아버지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어. 너무 무서웠거든. 외할아버지 앞에만 가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거든. 성격이 보통이 아니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마음은 따뜻한 양반이셨던 것 같아.”

유년시절 사고뭉치이면서 동네 골목대장이었던 나월환이 망국의 서러움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는 양산보통학교 상급반이 되면서부터였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일본 학생들로부터 ‘센징’(鮮人)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나월환의 가슴속엔 나라 잃은 슬픔이 응혈되기 시작했다.

 1922년, 그러니까 나월환이 12살 때 지금의 양산국민학교가 문을 열게 되는데, 그전까지는 아버지가 집 옆에 독서당을 지어 9남매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작달막한 키에도 체격이 다부지고 용맹이 뛰어나 꼬마대장 노릇을 했던 월환은 양산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식민지 조선에서 더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본행을 결심하게 된다.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행을 결심한 데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길은 오직 배움뿐이며, 나라를 앗아간 일본의 정체를 알려고 현해탄을 건너려 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가 일본 헌병에게 몰매를 맞아 한 달 동안 거동을 못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싹 트인 반일감정도 한몫했다.  

그때 나이 16-7살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일본행을 승낙받은 월환이는 일본 여행증명서, 지금으로 말하면 여권을 만들려고 면사무로 갔더니 도장을 가져오라 하였다.

 1920년대 당시 도장은 흔하지 않았다. 큰 비용이 들 뿐 아니라 영산포 읍까지 가야만 도장을 팔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월환이는 어디에서 고구마 하나를 구해와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새겨 넣었다.

어린 시절 팽이와 연을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팔아 용돈을 벌었던 나월환에게 고구마에 도장을 파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영산포 역에서 목포행 기차에 몸을 실은 그는 문평 역 앞에서 매형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당시 월환이의 매형은 문평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매형 저 일본에 공부하러 가요. 누나에게 안부 좀 전해주세요”
 
둘째형이 인천에서 무역선을 타고 있어 월환이가 인천으로 간 것이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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