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채석 기행작가

사진은 1970년대 원동역 풍경으로 색은 바랬지만, A자형 지붕의 녹색 기와가 선연하다. 하얀 벽에 16장의 유리가 끼워진 두 개의 창문이 있는 오른쪽 아래에 있는 물체가 처음엔 사람인 줄도 몰랐다. 이미지는 계단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는 뒤로 묶었고, 치마 안으로 연분홍 속바지를 입고 있는 여인이다. 필시 열차에 사랑하는 임을 보내고 이별의 서러움에 북받쳐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마냥 울고 있는 장면.

그래, 이별 후에 혼자 남은 아픔과 슬픔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별 없는 삶이나 생은 없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이별을 위한 연습 인지도 모른다. 원동역 주변에 신부의 드레스처럼 환하게 피어 있는 매화도 언제까지나 흐드러질 수 없듯이 모든 생은 멸滅에서 자유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둘이 떠나는 여행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다. 그만큼 내 삶을 돌아보며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해마다 봄이면 사진 속 그 여인이 밟혔다. 경칩과 춘분 절기 사이에 매화가 모두 꽃잎을 열어 따사로운 봄바람과 햇볕을 맞이하는 풍경을 찾아 수많은 사람이 또다시 구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에 올랐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열차는 움직였다. 낙동강 변은 다양한 여가활동을 즐기는 사람과 함께 뜸부기 과에 속하며 이마가 붉은 점의 쇠물닭 무리와 나물 캐는 여인들의 모습이 자연과 둘이 아니다.

열차가 지나는 동안 오봉산 자락의 끝을 돌아서니 넓은 들이 펼쳐진다. 마치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1부의 원형적 공간 평사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악양들과 같은 이곳은 화제리 들이다. 한때 한우 숯불구이로 명성이 자자했다. 지금은 시들하다. 내가 먹는 것에 관심이 덜한 만큼 그 이유는 굳이 알고 싶지 않다. 구포에서 줄곧 낙동강 줄기를 따라 거슬러온 무궁화호 열차가 지난해와 다르지 않게 원동역에 도착했다.

오천 년을 유유히 흘러온 강물에 테러를 가해 위리안치圍籬安置 하듯 가두어두었던 4대 강의 보를 일시에 열기라도 했을까. 열차의 각호마다에서 내린 여행객의 물결이 거대한 강으로 흐른다. 나 또한 물결 속에 유영하는 물고기와 같이 순매원(양산에서 규모가 꽤 큰 매실농원) 쪽으로 흐름을 따른다. 환하게 웃는 듯 활짝 핀 매화를 내심 기대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내가 뜻하는 대로 맞추어 주는 건 아니니까.

어떠한 일도 그렇다. 내가 하거나 하는 것이 다 뜻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헛된 망상이고 자기 욕심일 뿐, 남을 탓하는 것도 그 원인을 곰곰이 집어보면 결국 자신에게 있다. 그렇다. 동백꽃을 보러 벼르고 벼려 찾아간 선운사에서 동백꽃을 못 보면 못 본 대로 그만이다. 이날 원동에 간 건 매화를 보기 위함도 위함이지만, 기실은 강변에 여리게 피어나는 봄의 생동과 율동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이유라면 동안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각종 축제와 같이 각설이 북장단처럼 괜스레 마음이 들뜨고 싶지 않았다. 무리 지어 화려하게 핀 꽃의 군락보다는 호젓한 길에 풀꽃 한 송이가 좋았다. 번호표를 받아야 할 지경으로 유명한 맛 집보다는 허름한 장터 국밥에 소주 한 잔이면 족했다. 서점의 중요 가판대에 보란 듯이 진열된 베스트셀러 서적보다 헌책방에서 누군가 읽었거나 절판된 책을 구했을 때 무엇보다도 행복했다.

내 삶의 방식은 멋있거나 화려함을 경계하며 편리의 반대인 불편을 즐긴다. 남 보기에 촌스럽고 답답할 수 있다. 그러나 악취를 풍기는 두엄이 밭이랑에 뿌려져 농작물을 살찌우듯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러한 책이야말로 내 정신을 살찌우는 두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매화축제라는 이름의 부스마다 체험이니 특산품이니 지나는 이의 눈길을 붙들 때, 아무도 없는 대형버스 도서차량에 올랐다.

책장에서 빼어 든 책은 표지가 안개꽃으로 차분한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였다. 이 책은 10여 년 전에 출간됨과 동시에 읽었다. 책장을 덮었던 당시 암장이 드리워진 것처럼 어둠에서 헤어나고 싶지 않았다. 죽은, 중학교 3학년 소년 동호의 광주는 지금도 광주에 사는 사람의 아픔이다. 반면에 그 비극 속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이 그 아픔을 왜곡하고 조롱하며 아픈 상처를 건드린다. 살아 있는 시체와 같은 좀비즘인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함에도 알게 되는 것은 누군가에게 주워듣거나, 지면紙面이나, 통신매체 등을 통해서다. 그러나 진실을 묻어두고 되레 가짜 뉴스로 세상을 더럽히고 물들이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가 이 사회를 병들고 아프게 한다. 경제적이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정보를 조작하고 대중을 속이는 것도 SNS라던가 인터넷과 같은 편리함과 다양성의 어두운 단면은 분명 우리가 만든 문명의 폐해다.

아무튼, 한적한 봄의 전원을 거닐기 위해 찾아간 원동은 생각지 않은 매화축제로 꽃과 함께 지나는 사람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좋고, 옷차림이 화사하고 고운 건 물론이고 머리에 쓴 화환이나 꼽은 하트 모양의 장식도 좋다. 모두가 꽃을 통해서 너와 나를 가르지 않고 하나로 피어나는 것 같아 좋다. 그렇게 좋고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러한 바람도 하나의 선함이 묻어난 욕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덜컥 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