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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서
심은일  |  cimdfj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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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호] 승인 2024.03.10  22: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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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용식 공학박사·건축기술사·수필가

많은 눈이 내렸다.

아파트 단지 내 조경의 표정이 새로워졌다. 그들은 보안등 불빛에 내리는 눈을 보며 뿌리째 뽑혀온 고향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 눈맛을 보려면 아무래도 산이 제격일 것이다. 뒷산 초입에 들어서니 누군가가 먼저 산에 올랐는지 발자국들이 어지럽다.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산마루의 나무들 허리가 유난히 홀쭉하다. 우듬지의 가지들까지 처연하게 보인다. 계절을 놓쳤는지 미처 떨구지 못한 어린 굴참나무의 마른 잎사귀들 위에 눈이 얹혀있다. 꽃처럼 소담스럽다. 수확을 앞둔 목화밭의 꽃처럼 보인다.

겨울 산은 비어있다.

앙상한 가지만 휑한 산을 하얀 눈으로 채웠다. 소나무 솔잎에 얹힌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산이 깊지 않아서인지 고라니 같은 산짐승의 발자국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배고픔을 견딜만하나 보다. 앞걸음을 쫓다가 내 발자국을 만들어 보고 싶어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나와 동행하겠다는 것인지 까치 울음소리가 숲을 채운다. 내 안의 소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 같다.

걷다 보면 생각이 가지런해질 때도 있지만 오늘은 하얀 눈길을 걷는데도 내 안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후의 삶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나. 나이 들어서도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경제적인 문제가 따라줘야 하는데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것도 아쉽다. 흘러가는 대로 살자면서도 그냥 내려놓아 지지가 않는다. 내다 버렸다고 생각한 여러 후회거리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겨울 숲의 기운이 감성을 서늘하게 자극해 사유의 선명도까지 높였나 보다. 그래서 비어있는 겨울 산이 쓸쓸했나 보다.

겨울 숲은 조용하다.

밤나무 밑동에서 연둣빛 이끼가 등허리를 따라 오르고 있다. 계절을 아랑곳하지 않은 생명의 색깔이다. 봄이 오고 있다는 몸짓인가보다. 하얀 눈밭에 핀 복수초꽃이 생각나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고자바리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어린 날 소품 같은 겨울 풍경을 끌어들인다. 장독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 위에 쌓인 눈의 이미지도 저와 비슷했었다. 처마 끝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자라고 안방 아랫목에서 할머니가 긴 곰방대를 화로 가장자리에 땅땅 치시며 담뱃재를 털었다. 나는 화로 속 고구마를 언제쯤 꺼내 주실까를 침 삼키며 기다렸다.

생명의 근원이 궁금하다.

바람의 시작과 끝은 애매하다. 과학의 몫이다. 하지만 저 나무들과 눈 속에 묻힌 풀들의 자궁은 어디인지 탄생의 비밀이 궁금해진다. 그들의 탯줄이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중간에 옹이가 보이는데 그게 소나무의 배꼽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나무나 식물의 배꼽은 꽃과 벌과 바람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야. 자연 순환의 생태계는 참 신비롭다. 그럼 난 어디서 왔을까. 내 배꼽의 연결 고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머니와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왜 나였을까.

자연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물에 젖은 나무가 까맣다. 타들어 간 속내를 드러내 놓고 울고 있는 것 같다. 깊은 주름골은 풍상의 두께를 가늠하게 한다. 뿌리가 있는 저 땅속에서는 무슨 꿍꿍이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봄을 밀어 올리기 위해 삽과 괭이, 호미질하며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를 것 없다. 겨울 숲에 눈이 녹으면 곧이어 따뜻한 바람이 불 것이다. 이때쯤 수관에 수액을 퍼 올리는 펌프질을 시작한다. 수관에 물이 차오르면 연둣빛 아기 이파리가 밤으로만 소리소문없이 별을 보러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듯 숲을 색으로 채워 갈 것이다. 자연은 수선스럽거나 요란하지 않다.

봄은 이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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