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채석 작가

다른 꽃들은 교실 안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의 질문에 “저요. 저요.”하며 서로 자기를 시켜달라고 하는 것처럼 질리도록 보아 달라는 듯 화려함을 뽐내는 데 반해, 옥잠화는 지난날에 막 시집온 새색시보다 더 수줍어 보인다.

달리 사람으로 말하면 매사에 조용하고 말이 없는, 그런 존재로 느껴져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도 아직 철이 덜 들었지만, 어릴 적에 아버지의 나이가 된 지금 보면 볼수록 그 꽃이 좋다.

특히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 옥잠화는 희다 못해 눈부실 지경으로 선명하고 환하다. 아버지는 집에서 불과 백여 미터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교로 출근을 하셨는데 점심은 꼭 집에 오셔서 드셨다. 그때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별로 보잘 것도 없어 보이는 옥잠화 앞에 쪼그려 않아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나누는지?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 어떨 때는 미소를 머금고 어쩔 때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평소 꽃과 나무를 사랑하고 퇴근 때면 동료직원들과 주점에서 약주 한잔 드시고 오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을 뿐, 평소 거의 말씀이 없으셨던 분. 그러기에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어린 나이에 해보곤 했었다. 뭔가 남달라 보였던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방문을 노크하고 “오늘 바쁜 일은 없냐?”“네, 없습니다.”하면 함께 정원을 가꾸자 거나, 모든 일에 먼저 의견을 묻고 그 의견을 존중했다.

하루는 아버지 서가의 책 중에 수필집을 한 권 꺼내서 읽어 보던 중, 아버지와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수필을 쓰신 분은 당시 전남 광양의 모 중학교의 교장이었고, 강점기 일본 교오토(경도)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는 부분으로, J고등학교의 K형과 둘이서 지하철 화장실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에 수학하고, 밤이 오면 나란히 누워 천정 틈과 틈 사이로 보이는 별을 보며 조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읽고 나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학교에 다녔구나. 말이 좋아 천장 틈으로 별이 보였지 비가 오면 빗물이 줄줄 새어 나는 움막 같은 집이었겠구나 생각하며 당시 철부지의 심정으로도 동안의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이 부끄러워 더더욱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은 귀여움만 받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전후세대로 아버지의 나이 40세에 태어난 첫 아이였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우리말을 조선어라 하고, 일본 말을 국어라 했던 나라 잃은 망국의 처지에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을 보내고, 경부선 열차를 타면 볼에 살 붙은 조선인은 하나도 없었다는 시절, 남의 나라에 유학했으나 내지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질시와 멸시 속에 얼마나 힘들고 서러웠을까 싶고, 자력의 광복이 아닌 타력의 해방을 맞이한 것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피난도 가지 않고 북한괴뢰군의 점령 하에서 직업이 교사라 하면 자칫 우익으로 몰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한순간에 처단이 될 수도 있지만, 평소 남에게 지탄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셨는지 그런 세월을 보내고, 퇴근 후 목로에서 마시는 한 잔 술이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런 분이 별로 보잘 것도 없는 옥잠화가 피기 시작하면 질리도록 화려한 다른 꽃들에게는 데면데면하면서도, 관심 없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도 되는지, 마치 천상의 화원에서 만난 꽃이 기라도 하는 양 유독 옥잠화 앞에 쪼그려 않아 때론 기쁜 모습으로, 때론 회한에 잠긴 모습으로, 때론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계시는 것이 오래전에 정지된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되는 아버지의 초상이다.

그러한 아버지의 초상을 마음속에 간직한 아들은 여러 해 풍상을 보내면서도 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꽃, 그러나 이제 와 그 옥잠화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굳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너무나 화려한 것의 이면에는 깊이는 없고, 싸구려 향수와 같은 독한 향이 짙게 배어 있다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음이다. 또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는 아름다운 것과 함께하고, 추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추악한 것과 함께한다는 것으로 믿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짝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기에 결국 가지고 가지 못할 것에 욕심부리지 않고, 비록 들녘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작고 앙증스러운 풀꽃을 보며 감사한 마음을 더하며, 작지만 소박한 행복을 얻는 아들은 매번 옥잠화가 필 때면 아버지가 그립다.

전라선의 작은 역 명봉역은 눈물 나게도 아버지를 그리는 역이다. 문정희 시인의 시 〈명봉역〉의 마지막 모습에 아버지와, 박라연 시인의 시 〈명봉역〉에 많이도 아닌 조금 속의 아버지를 통해 꿈에서도 뵐 수 없었던 나의 아버지를 만났다. 영산홍보다, 붉은 장미보다, 수줍도록 하얀 옥잠화를 더 좋아하셨던 아버지. 아무런 말없이 피어만 있는 꽃과 같았던 무심한 아버지, 오늘 당신이 그립습니다. 봉황새도 울었다던 명봉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