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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가 있어야 꽃이 핀다
송용식 수필가  |  songys8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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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호] 승인 2023.03.13  06: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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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용식 수필가(시인)
'마치다 준' 작가의 <얀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강에 산다는 '카와카마스'라는 생대구는 강에서 좀 떨어진 초원 오두막에 사는 고양이 '얀'을 늘 찾아온다. 그는 얀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갈 때마다 뭔가를 꿔간다. 소금과 버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꿔감은 나중에는 버섯, 사모바르, 홍차, 설탕 등등 얀의 살림살이를 거의 거덜 낼 정도다. 그렇다고 갚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소설은 얀의 심정을 묘사한 이런 문장과 함께 끝난다. "한 걸음 한 걸음 초원의 비탈길을 오르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나의 마음은 말로는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행복감으로 벅차올랐다. 왔던 길을 돌아보니, 칠흑빛 어둠에 잠겨버린 대지의 아득히 먼 저편에 은색의 띠만이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좀 심심했다. 염치없는 생대구를 등장시켜 아낌없이 주는 어떤 미덕을 이야기하려 했나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런데 책 뒤에 붙은 작가의 맺는말을 기대감 없이 읽는 중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그 첫머리에 ’만약 그대가 카와카마스는 늘 꾸기만 하고, 게다가 꾸어 간 것을 갚을 줄 몰라 교활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대가 조금 지쳐 있다는 증거다. 오늘 하루는 우선 학교를 쉬어라. 학원도, 예비학교도 쉬어라, 회사도 쉬어라, 온 하루를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있어 보는 것이다.‘ 소설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재작년의 일이다. 아들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순간 내가 매주 월요일마다 경험하고 있는 가산디지털단지역의 출근길 광경이 떠올랐다.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이 계단을 꽉 채워 떠밀리듯 올라가는 모습들이. 자식보다 어릴 것 같은 애들도 저리 견디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생각이 든 적이 많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싶어 네 일 네가 잘 생각해서 하라고 했다. 아빠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이른 절박한 순간에서 외침처럼 들렸다.
 
인도를 거쳐 필리핀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아들이 직접 참여했던 해외 프로젝트의 정산 문제로 머리 아프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던 기억이 났다. 회사가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지 않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돌려막기식으로 주어지는 일에 자존감도 떨어져 자신이 마냥 소모품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소모품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는 충격이 컸다.
 
4개월 남짓의 쉼표가 효험이 있었던지 좀 더 나은 조건의 새 직장을 얻었다. <참> 없는 계단이 그러하듯 쉼표 없는 삶이 얼마나 팍팍했던 것일까. 그런 아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참고 견뎌보라 했다면 아빠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疾(질)은 빠르다, 아프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래서 '질주(疾走)'에도 '질병(疾病)'에도 疾을 쓴다. 즉 질병의 뿌리에는 쉼 없는 질주의 시간이 덩굴째 묻혔다 해도 될 것 같다. 반면에 '천천히 걷다'의 서행(徐行)의 서(徐)에는 평온, 전부라는 뜻이 있다. ‘서서히‘ ’쉬엄쉬엄‘은 아픔과 고통이 아닌 평온함을 낳는다.   
 
목표, 노동, 효율, 성과 못지않게 <쉼>이라는 낱말이 강조되는 세상이다. 다행이다. 그만큼 쉼이 없는 현실과 또 한편 쉼이 필요하다는 두 현실을 담고 있는 현상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런 것은 어떨까. 큰 도로변에 나가면 각종 지표가 공공 전자 게시판을 통해 뜨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 사회가 가진 피로 지수도 그날그날 수치화해서 그렇게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국가는 그 수치를 보면서 국민의 삶의 질을 고민하고 각 개인은 자신의 질주, 과로 여부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영화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삶을 작게 만들어야 사랑할 수 있다"라는 대사가 기억을 맴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링겔한스섬의 오후>에서 만들어진 용어 <소확행>도 한동안 그랬다. 소위 거창한 꿈과 행복을 찾아 질주하느라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다 놓칠 게 아니라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먹고, 청결한 셔츠를 입었을 때 느껴지는 그 일상의 조그만 행복을 찾자는 것이다. 이런 쉼표를 삶에 끌어들이는 것은 마음의 문제요, 용기의 문제인 것 같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일교차가 크다. 그 틈새에서 핀 매화, 산수유가 눈에 띈다. 반갑기 그지없다. 곧 여기저기에서 여린 새싹들이 몽글몽글 손을 내밀 것인데 생각만 해도 설렌다. 한 계절 꼬박 가졌던 나무의 쉼표 덕분이리라. 쉼은 그렇게 꽃을 낸다. 쉼표를 가졌는가. 그런 그대가 이 봄날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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