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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웅 국장 수필부문 당선작> 용서할 수 없는 용서
이철웅 편집국장  |  njt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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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호] 승인 2019.03.15  19: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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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용서’(容恕)의 유무(有無)를 두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순간, 2015년 1월 10일 새벽에 일어났던 일명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 떠올랐다. 임신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들고 집에 가던 한 남자가 차에 치여 사망한 뺑소니 사건이다. 운전자는 도주했으나 자수했고 피해자의 아버지는 고민 끝에 아들을 죽인 뺑소니 운전자를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그 운전자를 만난 다음날, 용서를 번복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운전자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태도에서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가해자의 뉘우침을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용서란 무엇인가.

지난 주말 한 인사의 자녀 결혼과 관련해 축의금을 내느냐 마느냐로 혼란을 일으켰다.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던 인사의 자녀 결혼식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참기 어려운 수모(受侮)를 수반한 검찰 조사 후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서 무혐의 처분으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내게 그 후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뉘우침이나 잘못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이었다. 내게 청첩장을 보냈다는 것은, 곧 그의 자녀 결혼에 축의금을 내라는 뜻이 아닌가. 나는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애경사에 거의 빠진 적이 없다. 소식을 전혀 몰라서, 참석하지 못한 적은 있지만 행사가 끝난 후라도 알게 되면 소정의 축조의금을 전달했다. 친불친과 관계없이, 연락 여부와 관계없이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성을 담아 편부를 하거나 직접 참석했다. 우리 집 한 달 생활비보다 훨씬 더 들어가는 축조의금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고 살지만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그의 경우, 청첩장까지 받았지만 선뜻 축의금을 내기가 망설여졌던 것은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용서’와 부딪친다.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한 말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다. 결국 인간이란 누구나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 씨름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이 주제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 됐을 때부터 싫든 좋든 우리 삶의 일부가 돼 왔다.
용서는 복수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이자 가장 하기 힘든 행동 중의 하나다. 남은 일생동안 가해자에 대해 계속 생겨나고 생각나는, 죽이고 싶을 정도의 악감정을 자제하고 억누르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용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사유는 신선한 주제가 아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한 주제다. 여러 책들에 용서에 대한 그들의 글과 생각들이 들어 있다. 그 생각들의 공통된 결론은 ‘용서하라’다.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를 했다고 해서 용서한 자신이 대단히 훌륭하다거나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며, 마찬가지로 용서를 받는다고 해서 이것이 자신의 잘못을 사면 받았다는 면죄부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 스스로가 과거로부터 벗어나 현재와 미래를 살기 위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용서하라‘고 대부분의 책들은 말한다. 그렇다. 맞는 말들이다. 그러나 가슴 속에 뭔가 알 수 없는 짓누르는 답답함이 있다. 용서에 대한 많은 책들의 설명에도 어딘가 2%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용서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하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그동안 쌓였던 분노나 복수의 마음에서 해방되기 때문인가? 용서를 한다면 적절한 시점은 언제인가? 가해자가 용서를 요청한 후인가, 아니면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것과 관계없이 아무 때나 해도 되는가? 또한 용서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는가? 즉 용서를 하기 전에 가해자가 뉘우치거나 반성해야만 용서가 가능하는가? 등이 숙제로 남는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좌우명 하나를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있고 말고” 하면서 “그것은 바로 서(恕)이니라”고 말했다. 이어서 공자는 “한 식경이나 하루, 또는 한 달쯤 용서해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십년이고 이십 년이고 평생토록 용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라고 덧붙였다.

이 서(恕)가 용서(容恕)이다. 서(恕)자는 같을 여(如)자 밑에 마음 심(心)자가 붙었다. 자기를 용서함과 같이 다른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서(恕)다. 용(容)자는 여기서 ‘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곧, 용서는 서(恕)를 용(容)한다는 것이다. 서무식(恕無識)이란 말도 있다. 무식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이다.
끝내 편부로 축의금은 전달했지만, 솔직히 용서까지는 아직 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로비치의 “용서란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일갈은 홀로코스트를 두고 한 말이다. 용서의 전제조건이 상실된 상태에서의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반면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는 자크 데리다가 한 말인데, 이는 무조건적 용서를 의미한다.

용서의 두 축을 이루는 블라디미르 장켈로비치의 ‘조건적 용서’가 옳은지 아니면 자크 데리다의 ‘무조건적 용서’가 옳은지 ‘용서’는 이래저래 딜레마다. 하지만 용서를 위해서는 최소한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전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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