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노금 나주시의원

문득 오래전 유럽 여행 중 프랑스 국립 레지탕스 박물관에서 보았던 낡은 인쇄기 한 대가 생각이 난다. 나치 치하에서 지하신문을 찍던 인쇄기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레지탕스 박물관이라고 하여 총기나 폭탄 같은 무력 저항의 상징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던 기억이 새롭다. "저항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는 내용의 안내원의 말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이다. 지식인과 언론인의 부역행위는 민중의 정신을 좀먹는 것이기에 더 엄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프랑스의 과거 청산의 원칙이라고 말하는 그는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나치에 협력한 언론은 폐간했었다고 하니 소유주도 당연히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처음엔 강하게 저항을 했었다가도 압박에 못 이겨 협력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언론인들도 징역 20년 이상에 처해지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아직도 흐릿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오랜 동안 종편 방송과 언론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매국을 했음에도 대를 이어 잘 먹고 잘 사는 친일 행적의 인사들에게 강한 반감 그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다. 또한 일제에 협력했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은 물론 사주였던 방응모, 김성수 같은 이가 아무도 단죄를 받지 않고 오히려 후손들까지 나서서 친일 행적 지우기는 물론 반민족 진상규명 위원회가 이들을 친일 행위자로 결정하자 후손들이 소송까지 내고 난리를 쳤다는 사실은 듣는 우리를 참으로 허탈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하기야 현직 대통령과 여당의 대표님께서도 부친들의 친일 전력에 대해 사과는커녕 조금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나의 개인적 불만은 어쩌면 조금은 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개념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께서 위안부의 삶을 그린 영화 <귀향>을 보고나서 너무나 가슴이아프다며 눈물 흘리는 사진을 보았다. <귀향> 특별 시사회에 참석해 관람을 마친 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위안부로 끌려간 20만 여명이 넘는 꽃다운 어린 소녀들이 이제 44명으로 줄었다는 소식이다.

영화는 어린 소녀들의 고통과 아픔을 처절하면서도 그러나 담담하게 어린 소녀들의 아픔을 그려 내었고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눈이 빨개지도록 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영화가 제작에 들어간 후 이런저런 어려움과 막대한 제작비의 부족에도 영화가 완성 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이 후원 펀딩에 참여해주고 손숙, 오지혜, 정인기 같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재능기부에 힘입은바가 크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제작한 영화 임에도 상영관을 구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다가 이제 몇 곳의 상영관을 어렵게 구해 개봉이 되고 있다고 한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에서라도 특별히 <귀향>이라는 이 영화를 보다 많은 시민이 볼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하니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광주에서, 나주에서도 곧 귀향을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겨져 반갑다.

지난해 타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한·일 양국의 정부가 일방적으로 타결한 피해자가 빠진 협상은 누가 뭐래도 무효임이 분명하다.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238명중 이제 생존자는 44명으로 줄었고 고령인 그들은 이 땅에서의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시다. 우리 민족의 비통한 역사인 위안부 참상은 가해자인 일본의 변변한 사과 한마디 없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얼마 전 94세인 숨어 사는 나치전범을 끝까지 추적하여 응징을 한 해외 언론을 본 적이 있다. 극명한 대조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는 해방 70년이 지나도 정부가 나서서 "매국노"를 기억하자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식화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이러한 일을 훼방하고 저지하고 참담하게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찌 할까?

프랑스처럼 혹독하게 단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록을 후세에 남겨 교훈으로 삼자는데 그걸 정부가 나서서 훼방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나라를 잃었던 치욕과 적국에 협력 했던 이들의 죄상하나도 똑똑히 기억하지 못하게 하면서 조국을 위해 몸 바치라며 애국을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 웃기는 일이다.

이 땅, 한반도의 상공에서 바다에서는 연일 전쟁을 연상시키는 군사훈련이 한창 인데 혹시라도 만에 하나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가정만으로도 끔찍하고 참혹하다. 아픈 역사를 바로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와 국민들에게 내일은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꾸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