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교수

3월의 들녘은 비어있다.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서 이따금씩 봄이 오는 소리를 들려줄 뿐 삼라만상은 여전히 한기를 머금은 채다. 양지는 유난히도 화사하다. 풀포기를 보듬고 꽃망울을 내민 모습이 도드라져 보여도 들녘은 바다 같은 고요에 취해 있다. 매화 개나리 등속처럼 벌써 꽃 잔치를 거두어 간 성급한 것들도 있긴 하다. 트인 공간에 도랑물 졸졸거리는 소리가 지나가고 응달받이 쪽으로는 동안거 중인 바위덩이가 히끗거린다.

★비워야 그릇이 된다

바라볼수록 이 계절의 고요가 깊다. 식목일을 훌쩍 지나 눈 내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코스모스가 만발한 오월도 있었지. 계절의 변덕을 두고 시절이 미쳐 돌아가는 게 아니냐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었지. 고요가 물질이라면 지금 이 순간의 고요는 바닥을 치면 튀어 오르는 고무공 같은 공기덩어리일지도 모르지. 이나저나 눈에 보이는 것이 차암 눈부시다. 이 순간이 설사 깨어날 수 없는 마법의 세계일지라도 이대로 잠겨서 오래도록 꿈꾸고 싶다. 

다시금 주위 사방을 둘러본다. 야산 몇 개가 웅크린 채로 눈에 들어온다. 간간이 채전이나 보리밭을 들러보는 농부가 세련된 삽화처럼 배치되어 있을 뿐 공수래공수거의 들녘에는 채워진 것이 없다. 그러고 보니 춘분이 코앞이고 우수 경칩이 지났지. 멀리 보이는 산그늘은 아직도 차가운 들녘에 수도승처럼 앉아 있다. 수목이며 돌멩이며 말라버린 풀포기하며…… 이 모든 것들에서 그 어떤 숨소리도 들을 수 없다. 머지않아 피어나고 우거지고 열매 맺을 이 지상의 잔치가 이토록 비워지고 이처럼 섬세한 명상에 잠기다니.

 노자에 '당무유용'(當無有用)이란 말이 있다. 흙을 이겨서 그릇을 빚을 때, 그릇 가운데를 비워야 비로소 그릇의 모양새가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세속적인 일들은 늘상 복잡 미묘한 욕망들의 조합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 살아가는 일상에서 비운다는 사실만큼 울림이 큰 말씀이 있을까. 언제부턴가 정치인들의 화두에 이 '비운다'는 말이 전가의 보검처럼 사용되곤 하였다.

주변에서 비워야 된다고 충고했는지 마음 비우기 위해 산에 간다고도 하고 비운 마음으로 붓 들고 필획을 긋는 사진을 공개하기도 하고……. 그런 모습들이 멋스럽다면 멋스럽게도 보인다, 비웠다고 말하면서 사진 찍던 사람들은 그러나 진짜로 비운 모습은 보여준 적이 없다. 비우는 일의 필요성을 말하고 비우러 간다고 산에 오르던 사람들이 하산 뒤에도 비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한 것은 비우는 일의 지난함을 말하는 것일까.

필자는 대승적인 것과 소승적인 것의 차이를 비우는 것과 비우지 못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군자와 소인배의 구분 또한 여기일 것도 같다. 소리 내는 악기를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몸통이 비어있다. 속을 비우지 않고는 소리를 낼 수가 없다. 비우지 못한 악기에는 리듬이 실리지 않는다. 문학도 마찬가지여서 궁핍한 시절의 배고픈 언어가 아니면 향기롭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수탉의 카리스마에서 배우는 것

비우고 사는 문제에서 수탉만한 존재가 있을까. 수탉은 자신의 영역에서 무리를 따르게 하는 특별한 카리스마를 이 비우는 일을 가지고 과시한다. 수탉이 짚동가리 같은 곳에 올라가 홰치고 울면 近洞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엎드린다. 카리스마에 넘치는 수탉의 행동거지가 단연 돋보이는 것은 모이를 쫄 때다. 암탉과 병아리가 모이를 쪼면 수탉은 威儀한 자세로 주변을 지켜주고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난 뒤에야 부리를 대고 재빨리 모이를 몇 번 쪼는 것으로 일을 끝낸다. 

수탉의 이 같은 포즈는 인간세상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코앞의 한 뼘지기에 집착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 어디에도 비워둔 곳이 보이지 않는다. 빼곡이 채우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면서 어찌 세상을 꼭지점에서 호령할 수 있겠는가. 비운 다음의 카리스마가 아니면 여하한 설득력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3월의 들녘이 가르친 정신이다. 

3월의 들녘에는 물이 끓어오르기 전의 고요가 보인다. 비등점을 앞둔 3월은 먹이 앞에 웅크린 맹수의 일촉즉발 또한 느껴진다. 새삼 필자의 가슴에 물결쳐온 3월은 비어있는 들녘이라야 활시위 같은 팽팽한 힘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스프링도 밑바닥까지 눌러야 천정 닿게 튀어 오르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의 비움 뒤에 밀물져 올 들녘의 울창함을 예감하고 있다.   
        
라퐁텐의 우화에 3월의 어느 날 쯤으로 생각되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날이 풀리고 양지쪽으로 짤짤거리며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새끼 사슴이 자박자박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때 새끼사슴 앞에 나타난 이리가 “오냐, 네 놈이었구나. 작년 이맘때도 물을 구정 거려서 마시지를 못했는데 이번에도 또 네놈이야! 너 잘 걸렸어” 하며 잡아먹으려 했다. 그러자 새끼사슴은 이리에게 이렇게 항변하였다. “ 그런 일 없는 데요, 작년 이맘때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이리는 다시금 말했다. “네놈이 아니면 네놈 아비나 형이라도 그랬겠지.” 억지이유를 들이대며 이리는 새끼사슴을 잡아먹어버리고 말았다. 

위의 이야기는 힘 가진 자는 자기 합리화로 행동한다는 사실이고 그 같은 합리화로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만다는 내용의 우화이다. 새삼스럽게도 강자는 늘상 탐욕적이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에 철저하다. 그게 자연이 가르친 약육강식이라는 생존의 질서의 직접화법이고 힘이 약한 새끼사슴은 이리가 쳐놓은 자기합리화의 그물을 벗어날 수가 없다.

★꽃샘추위도 안아주는 3월

성경에는 탐욕은 사망을 낳는다고 가르친다. 가슴과 머리는 물론이고 온몸을 욕심으로 채워버리면 생명은 어찌 싹을 틔우며 희망은 어찌 울울창창하겠는가. 크든 작든 아름다운 것은 사심(私心)을 버릴 때이다. 3월의 들녘은 무엇보다 사심을 버린 뒤의 들녘이다. 혹한의 계절을 건너자고 비웠겠지만 그게 시련을 넘어서는 지혜가 되고 그 결과로 아름다운 절정을 이내 예고한다.

경칩을 넘겼는데도 3월의 들녘은 여백 같은 침묵이다. 허나 여백 뒤에는 채움에의 믿음이 있기에 바람소리나 꽃샘추위의 칭얼거림마저 관용한다. 빈 들녘을 만들어 풍성한 계절을 예비하는 3월은 그래서 위대하다. 아니, 기다림을 인내하며 그 높다란 우듬지에 새순을 올리고 뒤 미쳐 어우러질 꽃과 열매를 부산하게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