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131년 전으로 올라간다. 당시 개화세상을 건설하려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일파의 혁명이 있었다. 이름 하여 갑신정변, 혁명은 실패했지만 우리 역사가 능동성을 보여준 야심찬 이벤트 중의 하나였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사대당과 개화당으로 갈리고 청나라와 일본이 맞 샅바를 잡고 대립하였다. 개화파가 꿈꾸던 개혁은 청을 불러들인 조정 때문에 3일 천하에 그쳐 물거품이 되었지만 이 일이 있고나서 사대당 정부는 “자라에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만큼 자신들을 단속하며 더더욱 굳건한 보수의 길을 걸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정말로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는가.” 갑신정변이 소장파 개혁주의자들의 계획대로 성공했다면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된 역사에의 늘품이 이 정도에 그쳤을 것인가. 허나 갑신정변의 성패를 미주알고주알 헤집어볼 생각은 없다. 다만 실패한 영웅 김옥균의 말로는 비극으로 끝이 났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가 꿈꾸던 가능성의 한계라면 지나치다 할까. 실패했지만 김옥균은 두 갑자를 훌쩍 지난, 지금에 생각해도 멋쟁이 정객이었다. 그래 건너뛴 세월만큼이나 김옥균이 보여준 역사에의 능동성을 이 자리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역사에서 김옥균은 비극의 인물이다. 허나 이 같은 비극은 다른 의미에선 혁명가 김옥균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대단한 행운일지 모른다. 겁도 없이 덤벼든 천길 나락 같은 건곤일척의 사생결단이 정치나 예술이 꿈꿀만한 새 세상에의 대회전이 아닐까. 예술도 어느 의미에선 세상의 본래성에 혁명을 가하는 일이다. 정치와 예술은 성격적으로는 달라도 진행과정은 동일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니까.

금년 2015년은 을미년이다. 이로부터 두 갑자 전인 1895년에는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는 단발령 사건이 걸쳐져 있다. 두 사건 모두 이제는 예술로나 다다라야할 역사의 시간이 되었다. 새해에 이런저런 나발을 불며 소원한 것들을 열거하는 대신 날으는 화살의 끝을 내 자신에게로 돌려야겠다. 신년의 초입에 생각한 김옥균은 꿈꾸다 좌절한 영웅이 아닌, 예술세상에다 건곤일척 하는 나 자신과 오버랩 되면서 엄청 나를 썰렁하게도 하고 들뜨게도 한다. 

그래 을미년 새해에는 시 쓰기와 그림그리기에서 내 자신부터가 수긍할만한 자존심부터 회복하고자 한다. 시 쓰기에선 시론을 겸한 작품특집을 제의해온 지면이 있어 벌써부터 사춘기처럼 밤잠을 줄이고 있고 벼르고 벼른, 장시(長詩) 한편 써보겠다는 계획 또한 실천에 옮기려 한다. 이럴 때는 언감생심 T.S .Eliot가 생각나고 섹스피어나 괴테가 하릴없는 사람처럼 내 시야를 지나간다. 확실히 나의 장시 작업은 벼른 만큼 이것저것을 펼치겠지만 어느 만큼에 나아갈지는 벌써부터 걱정이다. 이것이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인가. 어느 文學誌에선 지면부터 내놓고 계획 중인 장시를 연재하자고 제의를 해 왔다. 쓰고자 했던 것들이니 행복한 일이지만 김옥균의 3일천하 꼴은 되지 말아야 할 턴데 하는 생각뿐이다.

그림 그리기에선 열네 번째의 작품전을 5년도 넘긴 시간에 가졌었다. 내 이전의 그림에는 산이나 나무, 바위, 물 등 소위 재단되지 않은 자연으로 메웠다면, 이후에는 지상에 발 딛고는 살지만 밝고 신명나는 갖가지 환상들을 작업의 화판 위에 올리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이것저것을 꺼내놓고 몇 가지 입맛 장사를 하고 있다.

〈山이 된 사람들〉이나 〈태양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은 오래전의 주제인데 나로서는 솔직히 이들 주제를 마땅하게 소화해내지 못 했었다. 계속해서 나를 들뜨게 하는〈하늘 만지는 사람들〉, 〈와불을 세우는 사람들〉,  <바다에 갇힌 사람들〉, 〈물위를 걷는 사람들〉등등 줄줄이 사탕 같은 한 시대의 주제들을 서정성이 용해된 창작품으로 내놔야겠는데 얼마나 구미에 맞는 떡이 되려는지.

 예술이 담아낼 上品 질료는 어찌하든 환상이다. 을미년에 던져진 나는 내 예술에 정변 같은 동경과 환상을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 어찌 불 켤 것인가를 궁리중이다. 드문드문한 머리털이 진털받이가 되도록 절망하고 절망하건만 해답은 막막한 채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했건만 바라볼수록 아름다운, 이 세상에의 시간적 침식작용을 거뜬히 넘어서는 환상통 같은 작품을 기도드리고 있다. 꿈이나 생시를 가리지 않고 영감과 열정만을 듬뿍듬뿍 올려놔 주시라고, 그리하여 131년 전의 갑신년은 실패한 영웅들의 잔치였지만 2015 을미년에는 세상의 상상을 갈아엎는 기상천외한 환상잔치로 차려 주십사 기도중이다. 철부지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