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교수

맞춤형 독서라는 말이 있다. 요긴한 인용문구 하나라도 얻을 양으로 집어 들고 골몰하는 독서, 요즘 내 독서행태가 꼭 이렇다. 정신 못 차리게 쏟아지는 출판 홍수시대에 익사하거나 실종되지 않고 읽을 만한 책을 골라 독서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연말에 등화가친! 가을이 되면 독서하자고 권하면서 내세우는 상투적인 어구를 이른 추위에 내걸었다. 그래 가을이 뒷모습 보이며 저만치 가고 있는 시간에 막 독서를 끝낸 책이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이다. 다소 길다싶은 책 제목에 56인 시인의 시편을 이문재 시인이 골라서 엮었고 말미마다 짤막한 독후감까지 덧댄 141쪽 짜리 시집이다. 이 책속의 작품은 이 시인이 모 일간지의‘시가 있는 아침’에 소개한 작품들로 그가 밝힌 선정 이유는 이렇다.

 “평소 시를 잘 읽지 않는 독자에게 다가가고 (말을 걸고) 싶었다. 그리하여 시가 더 이상 ‘음풍농월’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었다. 한편의 시가 독자들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었으면 바랐다.” 그러면서 교과서나 문학 연구자들이 뽑아놓은‘명시’반열의 작품과도 거리가 있고 너무 무겁거나 어려운 시들, 메시지가 강한 시들, 너무 많이 알려진 시들은 제외했다는 단서까지 달았다. 그러나 이 같은 편자의 변은 겸사에 불과하다.

 좋은 시란 항용 인간을 비춰보는 거울의 의미가 다분하고 등불 밝히듯 가슴이나 머리에서 깨달음이 번져오는 작품을 말한다. 한 편의 시가 보태지면 세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좋은 시는 그만큼 삶의 방식과 의미를 바꿔 놓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갈피갈피에는 접어가며 반복해서 읽었고 아예 외워버리겠다 팔 걷어 부치고 싶은 작품도 수두룩하다.

시는 선언도 아니고 경제 논리를 선도하는 특효약도 아니며 인간 세상의 불의를 치유하는 만능 선(善)은 더더욱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시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며 상처와 깨달음까지를 치유하는 문자행위이다. 좋은 시편들을 굴비두릅처럼 볕 좋은 자리에 걸어두고 밥맛을 돋우고 싶다는 내 평소의 생각을 이 책속이 오롯이 받아주고 있었다.

시의 맛은 미주알고주알 까발린 길고 긴 이야기 속에 있지 않고 촌철살인적인 생략과 반전에 있다. 요컨대 식상했던 일상성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호기심이 동할 만큼 보고 만지면서 얻어낸 자별한 느낌, 이것이 시를 읽은 재미 아닐까.

 서양낭만주의 3대 시인으로 평가받는 셀리(Shelley)는 시인을“비공인 된 입법자”라 하였다. 누구도 시인더러 법을 지으라 하지 않았건만 끊임없이 법을 짓는 자라 하였다. 청나라의 평론가 김성탄은 “시인은 조물주의 미진한 능력을 보충해 주는 사람”이라 하였다. 비슷하지만 셀리 보다는 진일보한 탁견을 보인 김성탄의 생각은 당초 조물주가 능력부족으로 손 못 댄 부분까지를 완성해내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의미이다. 거창한 감이 있지만 시인은 이 같은 자존심에서 태어나고 길러진다.

 소개한 『꽃이 져도 ……』에 담긴 시편들은 저마다 작고 하찮은 사물적 현상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세상의 그리움 위에 올려진 간절하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시대와 사회가 경제논리에 밀려 정서적 노화현상을 겪고 있는 요즈음, 빵만으로는 안 된다는 교조적인 생각들이 새삼 커진다.

 아무리 어려워도 한국은 가능하다. 아니 대단하다. 평소 내 생각의 일단이다. 독자수가 적다는 시, 그래서 시시하다는 시, 시인은 그 시시한 사람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지금처럼 싱싱하고 힘찰 때가 없었다. 시와 시인에 대해 별의별 말들이 오가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은 시집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성찰과 공감의 자리에는 늘상 시가 등장하였음이다.

 시가 빛나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순간이며 그 순간은 인간세상의 영원을 지향한다. 어찌 개울물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이 또 다른 개울물 소리를 들을 수 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꽃이 져도…』에 담긴 시적 에스프리는 우리네 영혼에 울림을 지어내고 감동의 언덕까지를 출렁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