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10월은 수확의 계절이다. 눈 가는 곳마다 곳간이다. 모두들 배 불룩하게 열매를 임신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의 헛걸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고 운주사로 향했다. 따가운 가을 햇살 탓인지 자꾸만 목덜미 부근이 들썩거렸다. 영구산 운주사(靈龜山雲住寺)란 현액을 지나 걸어 들어간 입구마저도 멀게만 느껴졌다. 나와 운주사의 세월은 어림잡아 반세기를 헤아린다. 까까머리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 온 곳이 이곳 운주사였다. 그때만 해도 운주사는 별천지였다. 넝마조각 같은 돌부처나 석탑들이 다랑치 논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쉬고 있었으니까.

어린 맘에도 운주사는 신기하기만 했다.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하다가 조금씩 궁금증의 수위를 높여 갔다. 그 궁금증은 이내 ‘무엇 하던 곳이었을까’로 바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운주사는 분명 하나의 사찰이다. 그런데도 여느 사찰과는 여러 면이 파격적인지라 그 조성과정부터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불상이나 탑이 부지기수로 많은 것도 그렇고 조잡하고 무질서하게 어우러진 것이 이 사찰만의 개성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다. 광주에 나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다니는 동안 운주사는 까맣게 잊고 지낸 청라언덕이었다. 잊어버리고 살았다고 하기 보다는 잠시잠깐 밀쳐두었을 뿐인데 운주사는 마음에서 많이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내 몸에서 항용 피돌기하고 있던 운주사는 언제부턴가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단골코스가 되었다. 마음 휘휘할 때, 원근간에 손님 찾아왔을 때, 딱히 운주사만큼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운주사는 참 많이도 유명해졌다. 불제자든 아니든 운주사는 한번쯤 다녀가는 명소가 되었다. 이 나라 사찰 문화에서 운주사만큼 혁명적인 사찰명소가 또 있을까.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으로도 운주사에의 갈증은 깊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만큼 들추고 들여다 본 것마다 수수께끼 아닌 것이 없었다. 언제 지어졌을까. 어떻게 지어졌을까 저 많은 돌탑, 돌부처는 무엇에 쓰자고 깎아서 세웠을까. 실지 고서의 기록에도 운주사는 천불천탑의 사찰이라 하였고 얼마 전까지도 사찰 경내가 온통 석수장이 작업 훈련장 같은 느낌(?) 아니면 덜 정리된 고물상(?) 같았다.
 
운주사를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달랐다. 전문가는 전문가대로 달랐고 평상인은 평상인대로 달랐다. 운주사에 관한한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처럼. 그러나 축조 연대나 제작물들의 의도는 짚어낼 수 없을지언정 저들 석조물의 표현양식하며 수량하며 부처와 탑을 세운 신화의 골짜기는 지금도 마르지 않는 호기심으로 가득하기만 하다. 하여 찾아온 노래장이, 그림장이, 춤장이들 모두가 샘물 퍼가듯 운주사의 영감을 퍼가고 퍼갔다. 그런 중에 필자 같은 어벙한 반거칠이만 운주사를 고자 처갓집 다녀가듯 뻔질나게 들락거렸을 뿐 이날까지 소득 없는 불임의 세월로 이어왔다. 나에게 운주사는 세월로도, 찾아온 횟수로도 눈감고도 환한 곳이 되었다. 그런데도 운주사는 영감의 고삐를 멀찍이 비켜 간다. 곡조도 색채도 달아나버린, 빈 고삐 하나만 달랑 내 손에 쥐어져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꿈꾼다. 오늘도 헛걸음으로 ‘영감’이라는 열매를 잉태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옥동자 같은 빛나는 ‘영감’이 나에게 불현듯 찾아오리라. 그날 저 와불이 벌떡 일어나리라. 북두칠성이 유난히 반짝이는 가을밤이다.